내림마루/용마루 사이의 와구토와 기와 이음새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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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림마루/용마루 사이의 와구토와 기와 이음새에 대해서

시보드 2025-05-17 08:54:02 신고

내용:




문화재에 어느정도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한국 전통건축에서 지붕기와에,
특히 수막새가 있을 곳에 와구토가 쓰이기 시작하여 널리퍼진 것은 빨라야 영조 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전의 고건축을 복원하려 하거나, 재현하려 할 때는 원칙적으로는 와구토를 쓰지 않음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위계가 높았던 궁궐등의 고건축에도 와구토는 잘 쓰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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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강진 월남사지 같이 고려시대 대웅전을 재현하려는 경우에도 현어와 함께 막새도 같이 재현하는 등,
막새의 사용이 원래 조선후기 이전의 고건축양식임에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막새가 사용되는 곳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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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치미의 위치가 용마루와 내림마루 사이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해괴한 형태​ 인 것은 둘째치고,
용마루와 치미, 내림마루와 망새 사이의 이음새의 와구토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건축 복원/재현에서 이 양식이 월남사지에만 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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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와구토가 쓰였던 부분을 수막새로 재복원한 강릉 객사문입니다.
아쉽게도 여기서도 용마루와 내림마루와 망새사이의 와구토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한국의 대목수 분들이 깜빡해서 넘어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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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진은 제가 작년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갔을 때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위의 월남사지나 강릉 객사 문에 비교하면, 나름대로 최대한 마루와 기와사이의 이음새의 와구토를 보이지 않게끔 하려고
노력한 듯한 흔적이 보입니다만,  아예 안보이지는 않습니다.

거기다 와구토와는 별개로, 막새와 수키와 사이가 벌어져 있다던가, 마루의 기와의 이음새가 전혀 고르지 않다던가 ,
이음새가 고르지 않아서 심지어 잡초까지 자라나는 풍경​ 에 대해서는,
"자연 그대로을 사랑하는 조상들의 마음을 표현했다" 라고 생각해야 맞는건지 대목수들의 설계미스인지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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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최근에 각잡고 복원한 월정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가보지 않아서 기와 사이의 이음새가 고른지는 모르겠는데, ​용마루와 치미 사이의 와구토는 오히려 백제문화단지보다 더 퇴화 했습니다.​

이쯤되면 슬슬 궁금해집니다 "사실 조선이전 고건축도 망새와 마루 사이의 부분에 그냥 회반죽 칠을 한거아냐?"라고요.
그렇다면 ​ 아직 고건축이 남아있는 중국과 일본을 참조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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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의 고에이도몬(御影堂門)입니다. 히가시혼간지의 정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보다시피  한치의 오차 없는 치밀한 구조로 기와가 짜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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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교토 킨카쿠지(金閣寺) 경내의 후도도(不動堂)입니다. 부동명왕을 모시는 자그마한 전각이며
킨카쿠지 내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건물도 아니지만, 큰 위상이든 아니든 지붕기와의 이음새는 충실히 잘 짜여져있습니다.

다만 사실 고에이도몬은 메이지44년 (1911년),
후도도는 한국으로 따지면 조선 초중기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 때의 1572~1592년 사이에 세워졌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근세이전의 고건축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근세이전의 일본 고건축의 기와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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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 호류지(法隆寺)의 중문입니다. 제가 몇년 전 나라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호류지는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 최고(最古)의 사찰 중 하나입니다.
7세기후반 호류지 건립 이후 호류지 내의 금당과 오중탑은 헤이안시대 중기(900~1050)때 재건되었으나,
중문은 재건된 적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보다시피 , ​호류지 중문의 기와또한 이음새의 벌어진 부분 없이 깔끔하게 짜여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백제의 건축에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만큼, 호류지 중문의 기둥또한 한국건축의 대표적 미(美)인 배흘림기둥 양식입니다.
다만 호류지측은 그다지 대외적으로 알리고싶지 않아하는지 웹사이트에 "그리스에서 영향받은 양식"이라고 써놓고 백제에 대한 말은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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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기와박사의 영향을 직접받았다고 알려진 나라 간고지(願興寺)입니다. 이 곳도 제가 찍었습니다.
저 사이사이 보이는 주황색 기와가 바로 1400여년 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기와박사들이 제작하여 아직도 쓰이고 있는 기와입니다.​

이음새가 엉성하거나 회반죽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 보이시나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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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저우 시(忻州市)의, 당나라 8세기 때 세워진 남선사(南禅寺)입니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 건축인 남선사 대전(大殿)의 지붕 기와에도 엉성하거나 이음새를 맞추기 위한 회반죽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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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쑤저우 시 (苏州市)의 명나라 시기 조성된 대표적인 사대부정원 졸정원(拙政园)의 건축입니다.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기와지붕에 한해서 얘기하자면 기와 자체는 간고지 처럼 먼 옛날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낡은 감은 있어도
이음새 자체는 깔끔하며 회반죽 처리또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외에 포인트가 있다면,
위 사진의 건물은 놀랍게도 조선건축에 영향을 준 명나라대 건축인만큼 마루 부분에 양성도회같은 스타일의 양식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조선시대 양성도회는 두껍고 직각형태인 만큼 권위감을 내세우는데 비해 졸정원의 양성도회는 훨씬 부드럽습니다.
이게 명대의 양성도회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재료로 만든 것인지는 좀 더 연구해봐야할 거 같습니다.

아래 사진의 건물은 일반적으로 ​내부구조 를 보이게 하고 현어로 장식하는 삼각형의 합각부분이,
조선건축처럼 풍판으로 덮혀있고 현어같은 장식적 요소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 중국과 일본의 건축, 중세이전과 이후를 통틀어서 기와의 이음새를 엉성하게 해놓거나 회반죽을 그대로 내비치는 사례는
아직까지는 단 한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정교나 백제문화단지, 월남사지 등, 적어도 조선후기 회반죽 와구토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기록 이전의 고건축을 복원 및 재현할 때는
원칙적으로 수키와의 와구토 뿐만 아니라, 용마루 및 내림마루와 망새 사이의 와구토 또한 사용을 하지않아야하며
시에 기와 사이의 이음새를 깔끔하게 잇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그렇다면 한국의 고건축 전문가들은 정말로​ 이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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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익산 미륵사지박물관에서 찍은 미륵사지 복원모형입니다.

보시다시피, 복원모형의 기와는 아주 깔끔하며 와구토 또한 이용되어 있는 모습이 없습니다.
즉, 고건축 전문가들도 복원 시에는 사실 기와의 이음새가 중국과 일본의 고건축 처럼 깔끔하게 맞춰져야하며,
동시에 회반죽 사용또한 하지 말아야 함을 인지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한국의 고건축 복원/ 재현에는 아직도 회반죽이 빈번히 사용되며 기와의 이음새는 항상 엉성할까요?
제 개인적인 추측은 ​조선후기~말기의 건축 방법론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목수들이,
조선 이전의 기와지붕을 어떻게 재현해야할지에 대해 연구나 성찰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에 그 원인​ 이 있으리라 봅니다.

대목수 분들을 욕되게 하려는 것은 아니나, 최근 복원된 월정교마저도 회반죽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고려하면,
그러한 결론으로 자연스레 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선후기~말기의 건축양식은 어째서 기와지붕의 기와의 이음새를 엉성하게 만들고
회반죽 와구토를 그대로 노출하는 양식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요?
기와를 잇기 전에 지붕의 안 부분에 황토와 판석을 채워 단단하게 하는 방법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조상들의 방법론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과연 회반죽과 기와의 이음새는 무엇이 원인이었을까요?
그 부분은 여러분들의 생각에 맡기고 싶습니다.


저는 다만 백제와 신라와 고구려의 후계국인 대한민국에서 조상의 영혼이 담긴 문화유산을 재현코자 하는데,
단지 백제의 영향을 받아 고대문화의 일부가 형성되었을 일본보다도 그 재현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현실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움을 느낄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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