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김희준 기자= 16일(한국시간) 바르셀로나는 에스파뇰을 2-0으로 꺾고 스페인 라리가 우승을 확정지었다. 주인공은 18세 라민 야말이었다. 이날 오른쪽 윙으로 선발된 야말은 후반 8분 다니 올모의 패스를 받아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치고 들어온 뒤 정확한 타이밍에 환상적인 감아차기 슈팅으로 선제골을 만들었다. 후반 추가시간 5분에는 페르민 로페스가 내준 공을 받아 침착하게 수비 한 명을 제친 뒤 수비 사이로 패스를 보내 페르민의 쐐기골을 도왔다.
이번 우승으로 바르셀로나는 21세기 들어 스페인 라리가에서 12회 우승을 차지하며 사반세기의 절반가량을 우승하는 대기록을 쌓았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을 양분한 레알마드리드는 리그 9회 우승이다. 같은 기간 코파 델레이(스페인 국왕컵)에서도 바르셀로나는 8회 우승으로 2위인 레알(3회)을 크게 제쳤다. 비록 21세기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우승 횟수는 4회로 레알 8회에 2배 차이로 밀리지만, 바르셀로나를 스페인 최강팀이라 부르는 데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니다.
바르셀로나는 2010년대 후반부터 재정 문제로 고초를 겪었다.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 전 바르셀로나 회장은 필리페 쿠티뉴와 우스만 뎀벨레로 대표되는 무계획에 가까운 영입 기조와 방만한 운영으로 구단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주안 라포르타 회장도 바르토메우보다 나을 뿐 바르셀로나를 정상 궤도에 올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바르셀로나가 무너지지 않은 건 바르셀로나 유소년 시스템인 ‘라마시아’ 덕이다. 라마시아는 본래 1979년부터 사용된 클럽하우스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1988년 바르셀로나에 부임한 요한 크루이프가 숨결을 불어넣으며 세계 최고 유망주 육성소로 재탄생했다. 크루이프는 자신이 몸담았던 아약스의 유소년 시스템을 바르셀로나에 이식해 어릴 때부터 바르셀로나 철학을 체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바르셀로나의 힘이 됐다. 바르셀로나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부임한 2010년대를 전후해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차비, 세르히오 부스케스, 카를레스 푸욜 등 라마시아 출신 선수들이 동시에 전성기를 맞이해 한 시대를 풍미했다. 2008-2009시즌 유러피언 트레블이 외적으로 가장 빛나는 성과이며, 2010-2011시즌 경기력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는다.
그 정도로 압도적이지는 않아도 최근 두세 시즌 바르셀로나의 라마시아 수확은 매우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이번 시즌 리그에서 바르셀로나 1군에 데뷔한 선수 7명 중 라마시아 출신은 4명이다. 다른 팀을 거쳐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다니 올모를 제외해도 마르크 베르날, 세르지 도밍게스, 다니 로드리게스 등 3명이나 라마시아에서 1군으로 직행했다. 제라르 마르틴이나 파우 빅토르는 라마시아 출신은 아니지만, 바르셀로나 아틀레틱에서 팀 문화와 철학을 배운 뒤 1군에 데뷔한 케이스다.
올 시즌 바르셀로나가 국내 대회를 싹쓸이한 것도 라마시아 덕이다. 야말이 공격진에서, 파우 쿠바르시가 수비진에서 제 역할을 해줬다.
야말은 라마시아가 낳은 2020년대 최고의 히트작이다. 야말은 2022-2023시즌 차비 에르난데스 감독의 눈에 띄어 15세 290일 나이로 라리가에 데뷔해 구단 최연소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이번 시즌에는 모든 대회 53경기에 나서 17골 21도움이라는 충격적인 활약으로 하피냐,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와 함께 한지 플릭 감독의 막강한 공격 축구를 경기장에 구현시켰다. 슈팅을 제외한 모든 공격 기술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받으며, 나이답지 않은 놀라운 판단력과 축구 지능으로 수비를 휘저을 줄 아는 선수다.
쿠바르시 역시 2007년생임에도 침착성과 후방 빌드업 능력을 겸비해 단단한 수비를 펼칠 줄 안다. 때때로 미숙한 경기 운영으로 퇴장을 당하기도 하지만 유망주라는 점에서 정상참작이 가능한 수준이다. 쿠바르시는 이번 시즌 54경기에 출장해 이니고 마르티네스와 함께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었던 바르셀로나 중앙 수비를 지탱하는 기둥이 됐다.
이번 에스파뇰전은 야말의 활약으로도 라마시아의 위력을 체감했지만, 교체로 들어간 5명이 모두 라마시아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깊었다. 쿠바르시, 페르민, 알레한드로 발데, 엑토르 포트, 가비까지 모든 선수가 라마시아에서 구단 철학을 공유한 선수들이다.
올 시즌은 바르셀로나의 구단 철학이 레알의 그것보다 근소우위를 점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물론 바르셀로나도 슈퍼스타를 영입하고, 레알도 라울 아센시오와 같은 유망주가 등장하곤 한다. 그럼에도 21세기 전체를 놓고 평가했을 때 바르셀로나의 성공에 유망주들의 활약이, 레알의 성공에 슈퍼스타 영입이 절대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크루이프는 2016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바르셀로나에 심어놓은 철학은 지금도 라마시아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세계적인 스타 킬리안 음바페를 영입하며 또다른 우승컵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지만, 결과적으로 바르셀로나에 막혀 주요 대회에서 모두 무관에 그쳤다. 그런 의미에서는 죽은 크루이프가 산 페레스를 이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바르셀로나 인스타그램 캡처,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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