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내재화’는 국내 산업계의 공식 구호가 됐다. 반도체·가전·인공지능(AI) 등 주요 기업들도 자체 기술 확보와 해외 의존 탈피를 강조하는 분위기다. 정부도 기술 자립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보고 예산과 정책을 확대하는 중이다.
지난달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5년 추가경정예산에 따르면 AI 내재화에 1조800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이 중 1조4600억원은 국가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에, 752억원은 국산 AI 반도체 실증 및 상용화에 배정됐다.
하지만 현장을 보면 정부의 선언과 실질 확보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 특히 소프트웨어·툴 체인·지식재산(IP) 도구는 대부분 외산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 사례로 반도체 분야가 꼽힌다. 칩 설계에 필수적인 전자설계자동화(EDA) 툴 시장은 미국의 시높시스(Synopsys)와 케이던스가 과점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이들 툴 기반으로 설계 인프라를 운영 중이다.
인도 IT전문 매체 DQIndia에 따르면 두 기업의 글로벌 탐색적 데이터 분석(EDA)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한다. 지멘스 EDA를 포함한 상위 3개사가 전체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정부가 EDA 국산화에 예산을 편성했지만, 상용화된 국산 툴은 아직 미흡하다. 일부 중소 팹리스가 공정 시뮬레이션이나 내부 검증용으로 시험 도입하고 있으나, 대규모 양산에 투입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가전과 AI 인프라 분야도 상황은 비슷하다. 삼성전자는 스마트가전에 자체 음성비서 ‘빅스비’를 탑재하고 있지만 북미 등 글로벌 시장에서는 소비자 편의성을 고려해 아마존 ‘알렉사’와 구글 ‘어시스턴트’를 병행 지원하고 있다. 스마트싱스 플랫폼을 통해 외부 음성 플랫폼과의 연동성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LG전자의 스마트홈 플랫폼인 LG씽큐(ThinQ) 역시 ‘구글 홈’의 음성 인식 엔진과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를 활용해 글로벌 스마트홈 표준인 ‘Matter’에 부합하는 제품을 설계하고 있다.
AI 학습 인프라는 대부분 엔비디아 그래픽 처리 장치(GPU)와 파이토치·텐서플로 같은 외산 프레임워크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의 ‘GPU 1만 장’ 확보 계획도 사실상 외산 중심이라는 분석이다. 국내 AI 팹리스들도 개발·검증 인프라로 외산 클라우드 환경을 활용 중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NIA)에 따르면 국내 클라우드 인프라 시장의 약 65%는 아마존웹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 등 글로벌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외형은 국산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외산으로 구성된 ‘반쪽짜리 자립’ 구조가 산업 전반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후공정 장비의 알고리즘을 자체 개발하고 있지만, 검증 과정에서는 외산 장비와 툴 의존이 한계로 언급된다. 삼성전자도 엔비디아와 협력을 통해 AI 기반 무선 액세스 네트워크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선언적 국산화율보다도 핵심 기술 계층별로 어느 수준까지 독립 설계·운영이 가능한지를 따지는 진단이 필요하다고 평가한다. 전략적 기술 자립을 목표로 내세우기 위해선 ‘겉만 국산’인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장비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국산화율 몇 퍼센트를 보는 건 의미가 없다”며 “어떤 기술 계층을, 누구의 기술 없이 설계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가 진짜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겉만 국산처럼 보이는 구조를 넘어서려면 툴부터 플랫폼까지 설계·검증 전 주기에 걸친 독립 역량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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