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성지 기자] 국민의힘 21대 대선 후보로 최종 선출된 김문수 후보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독특한 궤적을 그려온 인물이다.
학생운동가에서 노동운동가, 국회의원, 경기도지사, 그리고 대선 후보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해왔다.
후보 선출 과정에서 여러 논란과 갈등이 있었지만 당 경선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최종 후보로 선출됐다. 그가 당의 갖은 압박을 버티며 자리를 지켜낸 건 노동·민주화 운동의 소산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김 후보는 후보 선출 소감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뜨겁게 살았다”고 말하는 등 수많은 갈등을 헤치고 대선 주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김 후보의 삶을 짚어봤다.
호롱불 밝히고 판잣집에서 공부해 서울대 합격
김 후보는 1951년 경상북도 영천의 경주김씨 집성촌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종손이었던 아버지가 집안 어른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가족들은 판잣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이후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그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영천읍 판잣집에서 호롱불을 밝혀 놓고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의 하나만은 대단했다.
그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초가 두 칸에 판잣집 한 칸을 사용했는데 어느 방에서나 천장 틈새로 파란 하늘이 보였고 벌레가 기어 다닐 만큼 볼품없는 집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 반대시위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당할 정도의 ‘반골’ 기질도 있었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매진한 김 후보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입학했다. 대학 시절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두 차례 제적되기도 했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두 차례 수감도 됐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김 후보는 우리 사회가 가진 노동 문제에 관심을 키워갔다.
노동 운동의 전설, “꽂히면 백스텝을 모른다”는 추진력
김 후보는 대학 시절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 1971년 10월 제적 후 1973년 10월 복학했지만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또 제적됐다. 1993년 9월 서울대에서 시국사건 관련자 복학 조치로 3학년 2학기로 복학했고 남은 39학점을 이수해 1994년 8월 29일, 43세 중년의 나이로 24년 만에 졸업했다.
이 당시 김문수가 꼬박꼬박 수업에 출석하자 교수가 “오지 않아도 됩니다, 시험 때만 오면 됩니다”라고 했지만 꾸준히 출석해 A학점을 받는 등 꾸준함과 성실한 면모도 있었다.
김 후보는 학생운동을 하다 노동운동으로 전향했는데 그 계기 중 하나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당시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으며 김 후보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노동운동을 시작했던 김 후보를 이소선 여사는 아들처럼 아꼈고, 노동현장에서 투쟁하다 다치거나 고초를 겪을 때 직접 찾아와 격려하고 돌봐주기도 했다. 김 후보는 한 인터뷰에 “이소선 여사는 힘들고 어렵던 시절 항상 따뜻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김 후보의 ‘꼿꼿함’은 이 시절에도 엿볼 수 있었다. ‘5·3 인천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온 그는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지만 끝내 ‘동지’의 소재를 밝히지 않았다. 당시의 고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남았다. 김 후보는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 민주화 투쟁 중 독재와 맞서 싸운 평생의 상처”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김문수는 한번 꽂히면 백스텝(뒷걸음질)을 모른다”며 추진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심상정 정의당 전 대표는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같은 선배였다”고 말한 일화는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가로 활동한 김 후보의 젊은 시절을 대변하는 말이 됐다.
노동현장에서 부인 만나다, 전남 출신 여성운동가와 영호남 커플
부인 설난영 여사를 만난 것도 노동운동 과정에서였다. 한국노총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청년부장 시절 남서울지부 여성 부장이자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던 설 여사를 알게 된 김 후보는 “설 분회장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라고 프러포즈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이후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위기에 직면해 도피하던 김 후보가 설 여사와 여동생이 운영하던 빵집을 최후의 도피처로 삼았던 게 인연이 돼 결혼에 이르게 됐다.
전남 고흥 출신으로 순천여고를 졸업한 설 여사와는 영호남 커플이다. 김 후보는 당시 “딸을 어떻게 먹여 살리겠느냐”는 교사 출신인 장인의 말에 “저는 만인(萬人)을 위해 사는 사람인데 여자 하나 못 먹여 살리겠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 후보와 설씨는 1981년 9월 26일 서울 봉천동 한 교회에서 웨딩드레스도 없이 원피스만 입고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남녀 동시 입장과 순백의 드레스가 아닌 평상복 차림의 결혼식이었다. 설 여사에 따르면 평상복을 입고도 결혼할 수 있다는 걸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두 노조위원장의 결혼식을 ‘위장 집회’로 의심한 공안 당국이 ‘닭장차’ 5대를 보내 결혼식을 감시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4년 본격 정치활동 시작, 경기도지사 연임으로 능력 인정
좌파에서 우파까지 철학·경험 모두 겪은 인물
경기도지사·노사정위원장·고용노동부장관 등 행정경험 다양
6월 항쟁 이후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며 1990년 민중당을 창당했지만 낙선 후 택시기사로 일하며 지내던 김 후보를 다시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건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1994년 김영삼에게 영입돼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우파로 전향했다.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함께 입당 후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부천시 소사구에 출마한다.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박지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전국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어진 10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은 김문수라는 이름 석 자를 국민들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시간이었다.
그는 현실 속에서도 정의를 지향했다. 깐깐한 성격, 빈틈없는 논리, 청빈한 생활은 한나라당 내 보기 드문 캐릭터였고 ‘가난한 국회의원’으로 상대 당 어느 누구의 공격에서도 자유로웠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폭로하며 야당 저격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이 같은 저력으로 김 후보는 제16·17대 총선에서도 부천 소사에서 3선에 성공한다. 공천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할 때는 ‘역대 가장 공정한 공천’이라는 평이 따랐다.
2006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사임한다. 당 대표 경선에서는 두 차례 탈락하며 매번 낮은 최하위 득표였지만 당당히 도지사에 선출돼 모두를 놀라게 했다.
취임 첫해부터 그는 ‘앞서가는 경기도’, ‘편리한 경기도’, ‘잘 사는 경기도’, ‘매력 있는 경기도’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경기도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전력을 다했다.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을 살리면서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불합리한 수도권 규제 폐지를 추진하고 광역교통망 구축, 외자 및 기업 유치,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등의 정책을 펴 경기도 내 신산업 발전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다.
특히 경기도 최초의 대중교통 환승할인이 적용된 수도권통합요금제 단행과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기획 등 경기도의 교통복지를 몇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민선 최초로 경기도지사 연임에 성공하는 등 정치인으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2010년에는 4년간 삼성전자와의 협의 끝에 평택 고덕 산업단지 유치에 성공하기도 했다.
‘도지삽니다’ 사건이 있긴 했지만 경기도지사로서의 김문수는 분명한 업적과 능력이 있는 뛰어난 광역자치단체장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갈등 끝에 대선 주자로 나서…‘꼿꼿문수’ 별명으로 보수층 결집
한때 당을 떠나 활동하던 김 후보는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장(장관급)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며 보수진영 차기 주자로 몸집을 키웠다.
12·3 비상계엄 사태 사과 요구에도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국무위원으로 ‘꼿꼿 문수’라는 별명을 얻으며 강성 보수층의 지지를 얻었다.
탄핵 이후 보수 진용의 잠룡 중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국민의힘 경선에서도 당당히 1위에올랐다. 후보 교체 과정의 논란이 있었지만 자리를 지켜내며 최종 후보로 선거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일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김 후보는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뜨겁게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는 “제 어릴 적 소원은 따뜻한 밥 한 끼 먹는 것이었다, 7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지만 출세를 포기하고 자신보다는 이 나라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며 “그 어느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 약한 사람들을 떠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지지율 면에서는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앞서고 있지만 여전히 보수층에서는 김 후보가 이 후보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히고 있다. 김 후보의 과거 노동 운동 경험과 3선 국회의원, 유일의 연임 도지사라는 다양한 경험과 실적을 통해 나라의 운영도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 주요 약력]
△1951년 경북 영천 출생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5~17대 국회의원 △민선 4~5기 경기도지사 △제13대 경제사회노동위원장 △제10대 고용노동부 장관 △제21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힘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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