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손성은 기자] ‘5년이면 갚는 채권’이라는 믿음이 깨졌다. 롯데손해보험이 발행한 채권을 예정대로 상환하려 했지만, 금융당국이 이를 막은 것이다. 이 채권은 ‘후순위채’로 불리며, 보험사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일종의 장기채권이다. 형식상 만기는 10년이지만, 관행적으로 5년께 조기상환해왔다. 투자자들도 ‘5년 만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국이 “지금 상환하면 회사 재정이 위험해질 수 있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 여파로 채권 가격은 떨어지고, 이자는 더 줘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시장 전체가 출렁이고 있다.
롯데손보 한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사례로 인해 다른 보험사들도 같은 의심을 받고 있다. 특히 재무 여건이 취약한 중소형 보험사들을 중심으로 ‘혹시 이 회사들도 제때 못 갚는 것 아닌가’ 하는 불신이 커지고 있다. 투자자들은 보험사 채권 투자를 꺼리기 시작했고, 보험사들은 자금을 더 비싼 이율에 조달해야 하는 악순환에 직면했다. 이제는 보험업계 전체가 자금조달 방식을 새롭게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후순위채 시장, 연쇄 불신 확산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롯데손보 사태 이후 자본건전성이 취약한 보험사들의 후순위채 유통금리가 일제히 오르고 있다. 푸본현대생명, KDB생명 등 지급여력비율이 150% 초중반에 머무는 중소 보험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회사의 후순위채는 민간채권평가사 평균금리(민평금리)를 웃도는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롯데손보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 지급여력(K-ICS‧킥스) 비율이 154.59%로 기준을 겨우 넘긴 상황이었다. 당국이 ‘이 상태에서 조기상환을 허용하면 기준치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시장이 ‘보험사 후순위채는 5년 만기’라는 암묵적 전제를 재검토하게 된 배경이다.
◇자본확충 시급한데 차환 리스크 현실화
이번 조기상환 불허는 후속 충격을 불러오고 있다. 보험업계는 올해 약 59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 조기상환 일정을 앞두고 있다. 푸본현대생명, 흥국생명, 신한라이프, 메리츠화재, 흥국화재 등이 대상이다.
후순위채는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기 위해 ‘상환 후 재발행’이 필수적인 구조다. 따라서 한 번 상환이 막히면 전체 리파이낸싱 전략이 흔들린다. 한 보험사 재무담당 임원은 “이번처럼 한 건이라도 조기상환이 거절되면 시장 전체가 불안해진다”며 “비슷한 사례가 한 번 더 나오면 금리가 크게 출렁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험사 자본여력, 제도 변화에 압박 가중
보험사들의 자본 부담은 회계·감독 제도 개편으로 한층 커졌다. 지난 2023년 도입된 새 보험회계기준(IFRS17)은 보험사가 장래 보험금 지급 부담을 보다 보수적으로 평가하도록 바꿨다. 이에 기반한 K-ICS 체계는 보험사의 건전성을 수치로 표현한다. 그 결과 다수 보험사의 K-ICS 비율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여기에 자산운용 수익성 악화와 시장금리 하락까지 겹치며, 중소형 보험사들은 자본 여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후순위채 리파이낸싱마저 흔들리면 자본확충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감독당국, ‘관행보다 규정’ 택한 첫 사례
이번 사건은 감독당국이 ‘시장 관행’이 아닌 ‘제도 기준’을 우선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금까지는 5년 시점의 콜옵션 행사가 마치 의무처럼 인식됐지만, 이는 법적 강제사항이 아닌 경험적 관행에 불과했다.
송미정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요건 미충족으로 인한 조기상환 불허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앞으로 투자자들은 각 보험사의 내재 건전성을 꼼꼼히 살펴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독당국이 명확한 조기상환 기준이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예측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후순위채 시장, ‘신뢰 회복’이 핵심 과제
이번 롯데손보 사례는 보험사 자본조달 구조가 관행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드러낸 계기다. 당국의 결정 하나에 시장 전체가 흔들릴 만큼, ‘규칙과 정보의 불확실성이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금융당국은 우선 조기상환 요건에 대한 명확한 기준 제시(K-ICS 170% 이상 등)를 검토해야 하고, 보험사들은 콜옵션 행사 여부에 대해 사전 공시 강화하고 투자자에게 리스크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후순위채 외에도 신종자본증권 등 다양한 자본수단을 병행해 활용할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신뢰 회복이 중요해졌다. 후순위채는 보험사의 재무 기반을 떠받치는 핵심 수단이며, 투자자에겐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 투자 대상이다. 이 신뢰가 흔들리면 결국 피해는 보험계약자와 금융시장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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