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프랑스 문화원의 모습)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시네마테크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어난건 1990년대, 영화를 필름으로 상영하는 제대로된 시네마테크가 생기기 시작한건 2000년대임.
즉 한국은 5공화국 시기까지 시네마테크가 전무한 나라였고, 그랬던 시기에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단비가 되어 주었던 것이 외국 문화원임.
프랑스 문화원, 독일 문화원 등의 외국 문화원은 외국 대사관에서 관리하는 것이기에 군사 정권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고, 그 덕에 당시 한국에선 정상적인 경로로 볼 수 없던 고다르, 파졸리니 등의 영화들을 무삭제로 틀어주곤 했음.
사실상 그 당시 시네필들 입장에선 이런 곳들이 책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던 외국 영화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던 것.
비디오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80년대 초까지 이런 문화원들의 위상은 절대적이었고, 비디오 문화의 유행 이후에도 시네마테크로서 어느 정도의 명맥을 이어갔다고 함.
(85년도의 프랑스 문화원 프로그램)
(86년도의 프랑스, 독일 문화원 프로그램)
(87년도의 프랑스, 독일, 일본 문화원 프로그램)
영화 잡지 스크린에 매달 수록된 문화원의 영화 상영 프로그램 목록임.
그 당시엔 이렇게 영화잡지에 실린 내용을 통해 주요 문화원들의 기획전을 확인했던 것 같음.
잘 보면 당시 프랑스 문화원에선 한 달치의 프로그램을 판매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도 정보를 확인하는 좋은 수단이었을 듯.
그리고 87년도 당시 문화원 영화 티켓값이 500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같은 해에 한국에서 개봉한 탑건 광고에 적힌 피카디리 극장의 티켓 일반요금이 3500원임.
즉 당시 물가 기준으로 문화원의 티켓값은 파격적으로 저렴했던 셈.
(프랑스 문화원이 운영했던 지하 영화관 살 드 르누아르의 풍경으로, 흑백사진은 1977년경 모습)
티켓값이 이렇게 저렴한데 외국영화를 무삭제로 틀어주다보니, 외화 수입 제한 정책으로 미개봉되거나 검열로 난도질된 인기작들을 완전판으로 볼 수 있다는 메리트에 끌려 극장을 찾는 일반관객도 많았다고 함.
특히 소피 마르소 같은 스타들의 영화가 걸리는 날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고 표가 금방 매진이 될 정도의 인기였다고.
전성기 시절 프랑스 문화원의 부흥은 당시 영사기사였던 박건섭의 영향도 컸는데, 이 사람이 영화 토론을 주도하고 ‘토요단편’이라는 청년들의 단편영화 제작 및 감상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한국 시네필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함.
강우석 감독이 대표적인 토요단편 출신.
프랑스 문화원 세대 시네필의 대표적인 사례가 정성일, 이명세, 박광수, 김홍준 등인데, 정성일과 김홍준은 박건섭을 자신들의 영화스승으로 여긴다고.
프랑스 문화원은 문화원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위상이 있었고 80년대 중반까지 그 영광을 유지했으나 비디오의 등장으로 그 영향력이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고, 문화 개방이 가속화된 90년대엔 영화 동호회 열풍과 그런 모임들의 자체적인 영화 상영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시네마테크로서의 문화원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됨.
여담이지만 그 시절 문화원들은 여러 사정으로 영화들을 무자막이나 영어 자막으로 틀어줬는데, 이 때문에 프랑스 문화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프랑스어 더빙에 영자막으로 상영한 일도 있었다고 함.
정성일이 고1때, 즉 70년대부터 문화원을 드나든 전형적인 문화원 세대인데, 그가 당시의 프랑스 문화원을 추억하며 쓴 ‘프랑스문화원…문화 해방구이자, 박정희 시대의 슬픈 게토’라는 글이 있으니 관심있으면 한번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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