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기사 문학 계보 잇는 걸작…완역본 12년 만에 개정 출판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르네상스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한때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이탈리아의 대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 번역본이 절판된 지 12년 만에 재개정을 거쳐 독자들을 만난다.
출판사 휴머니스트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가 집필한 '광란의 오를란도' 결정판(전 2권) 번역본을 출간한다. 최근 온라인 예약 판매를 시작한 이 책은 이달 12일 출고될 예정이다.
'광란의 오를란도'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양 세력이 대립하는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기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 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주인공 오를란도는 유럽의 전설 속 기사단 '샤를마뉴의 12 기사' 우두머리다. 기사 문학의 시초인 11세기 말 프랑스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주인공 롤랑과 동일 인물로, 오를란도는 롤랑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작가 루도비코 아리오스토는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1441∼1494)가 남긴 미완의 서사시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Orlando Innamorato)를 이어서 쓴다는 생각으로 '광란의 오를란도'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처럼 '광란의 오를란도'는 종전의 대표적 기사 문학 작품의 전통적 인물과 서사를 이어받지만, 동시에 기사 문학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인물이 서로 사랑에 빠지거나 연인을 따라 개종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 강조돼 있고, 일부 에피소드에서는 수도원의 세속화와 타락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를란도는 이슬람교 세력의 절세 미녀 안젤리카에게 반하지만, 안젤리카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이에 오를란도는 광기에 사로잡혀 날뛰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는다.
이상적인 영웅상과 거리가 먼 기사들이 인간적인 약점과 감정에 흔들리고 실수하고 좌절하는 모습은 중세의 기사도가 무너지고 인본주의가 대두된 르네상스 시대의 달라진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한두 명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 수백 명에 달하는 인물의 여러 이야기가 뒤얽힌다는 점이다.
제목만 보면 오를란도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될 것 같지만,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른 여러 기사의 사랑과 좌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세력의 다툼, 기사들의 무용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프랑스군의 용맹한 여기사 브라다만테와 이슬람교 진영 기사 루지에로의 사랑이다. 작가의 후원자였던 에스테 가문의 시조가 이들 두 사람이라는 설정 때문에 특히 공들여 썼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수많은 이야기를 담느라 '광란의 오를란도'는 총 3만8천736행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일리아스'나 '신곡'의 2.5배를 웃도는 분량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서사와 인본주의에 기반한 매력적인 인물 묘사 덕분에 이 작품은 후대의 수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줬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이탈로 칼비노(1923∼1985)는 '광란의 오를란도'를 극찬했고 이 작품을 소재로 소설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동설을 알린 이탈리아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광란의 오를란도' 일부 구절을 암송할 만큼 애독자였다고 한다.
이처럼 높은 명성을 누린 작품이지만, 번역이 어렵고 분량이 방대한 탓에 국내에는 비교적 늦은 2013년에야 완역본이 출판됐다. 그나마 초판만 나오고 절판됐다가 이번에 수정과 보완을 거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번역은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한국어와 이탈리아어의 차이 때문에 각 행이 11음절로 이뤄진 원서를 온전히 옮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길이를 맞췄다.
워낙 분량이 길고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점을 고려해 각 칸토(곡) 앞에 내용을 짧게 요약한 글을 붙이고 작품의 이해를 도울 각주 2천254개를 달았으며, 지도와 인물 관계도를 수록했다.
아울러 프랑스의 유명 화가 귀스타브 도레(1832∼1883)의 삽화 209점을 본문 사이사이에 실어 비장한 분위기를 더했다.
1권 1천184쪽, 2권 1천216쪽.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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