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양우혁 기자】 러시아 자동차 시장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중국차가 빠르게 시장을 점령했지만, 품질과 서비스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과거 철수했던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복귀 가능성을 탐색하는 분위기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러시아에서 다수의 상표를 출원하며 시장 내 움직임을 재개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도 최근 러시아 연방 지식재산서비스(로스파텐트)에 ‘현대 ix10’, ‘현대 ix40’, ‘현대 ix50’, ‘기아 마이 모빌리티’, ‘어 베터 웨이 투 고’, ‘그린 라이트’, ‘기아 에디션 플러스’등 8개의 상표를 등록했다. 이 상표들은 자동차, 예비 부품, 액세서리 관련 부문에 등록됐다.
현대차그룹은 한때 러시아에서 ‘국민차’로 통할 만큼 강력한 입지를 가졌다. 2010년 현대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완성차 공장을 설립하며 현지 생산 기반을 구축했고, 기아는 소형차 중심의 전략 차종을 투입하며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혔다. 당시 판매 모델인 솔라리스, 크레타(현대차), 리오, 리오X(기아)는 가격 대비 성능으로 중산층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2021년 기준, 기아는 러시아에서 20만5801대를 판매해 점유율 2위에 올랐고, 현대차도 17만1811대를 기록하며 3위에 올랐다. 현지 브랜드 라다(약 35만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현대차그룹이 러시아 시장을 사실상 장악했던 유일한 외국 브랜드였다.
하지만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의 대러 경제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부품 수급망에 차질이 생겼고, 현대차는 공장 가동을 중단한 끝에 2023년 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지분 전량을 러시아 기업 아트파이낸스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포함한 지분 100%를 1만루블(당시 약 14만원)에 매각했다. 다만 계약서에는 2년 내 공장을 되살릴 수 있는 ‘바이백 옵션’이 포함돼 있어 올해 12월까지는 재매입이 가능하다.
전쟁 이후 러시아 자동차 시장은 급격한 구조 변화를 겪었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철수하면서 생긴 공백을 중국 브랜드들이 빠르게 채웠고, 현재 러시아 내 신차 수입 물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다. 러시아 시장조사기관 아우토스타트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7.6%가 “어떤 경우에도 중국차는 구매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주요 이유로는 낮은 품질, 부품 수급의 어려움, 가격 대비 가치 부족 등이 꼽혔다.
러시아 정부도 중국차 중심의 시장 구조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2023년 하반기부터 병행수입을 제한하고, 간이 인증(ZOETS)을 폐지한 뒤 정식 형식승인(OTTS)만을 인정하고 있다. 차량 등록 시 부과되는 재활용 수수료는 지난해 10월 최대 85% 인상된 데 이어 올해 1월에도 추가 인상이 단행되며 사실상 수입 장벽이 한층 높아졌다.
업계에선 현대차그룹의 당장 복귀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시장 환경 변화에 따라 재진입 여지는 충분하다는 기대감도 감지된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식적인 복귀 논의를 진행하긴 어렵지만, 상표 출원이나 러시아 관련 정보 수집이 이어지는 걸 보면 내부적으로는 ‘언젠가는 다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되는 분위기”라며 “다만 지금으로선 어디까지나 상황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러시아 내 기존 딜러망이나 거래선을 현대차가 완전히 정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현지 유통망이나 소비자 기반이 여전히 남아 있는 만큼, 상황이 조금만 안정되면 재진입을 검토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쟁 이후를 대비한 현대차그룹의 움직임에 주목하며, 시장 재진입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여건이 서서히 마련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상표 출원과 공장 재매입 옵션 등은 단순한 상징적 조치가 아니라, 복귀에 대한 내부 준비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분석이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현대차는 이미 사전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며 “러시아 시장은 중국차가 점유하고 있으나 소비자들의 품질과 A/S 불만이 적지 않고 현대차·기아가 과거에 쌓은 브랜드 신뢰도도 여전히 유효한 만큼 전쟁이 종식되면 빠르게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 대한 재매입(바이백) 옵션이 남아 있어 물리적 기반도 확보돼 있다”며 “이러한 움직임이 실제 복귀로 이어지기 위해선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가 일정 수준 이상 완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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