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는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야생동물 중 하나다. 도심 인근 산책로는 물론, 고속도로에서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갑자기 등장하는 고라니는 사고 위험의 원인이다.
논밭을 헤집으며 농작물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고라니는 환경부에 의해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밖에선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 고라니는 국제적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보호종으로 분류돼 있다.
개체 수가 극히 적은 중국과 러시아, 유전적으로 가치 있는 개체가 정착한 영국 등에서는 보호, 복원, 연구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라니를 대하는 시선이 한국과 세계 사이에서 극단적으로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벼·감자까지 갉아먹는 농촌의 민폐동물
고라니는 과거 천적인 늑대나 삵, 표범 같은 육식동물이 사라지며 통제받지 않는 번식 환경을 가지게 됐다. 포식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개체 수가 증가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한국에는 약 70만 마리의 고라니가 서식 중이다. 전 세계 고라니의 85%가 한국에 집중돼 있다.
이로 인해 농촌 지역의 피해도 크다. 고라니는 풀이나 나뭇잎뿐 아니라 벼, 감자, 배추 같은 농작물도 먹는다. 농작물 피해가 잦다 보니 농민들 사이에선 ‘민폐 동물’로 불린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고라니로 인한 농작물 피해액은 90억 원을 넘어섰다. 전체 야생동물 피해액의 17%에 해당한다.
로드킬 사고 증가하는 봄철
고라니는 고속도로 로드킬 사고의 주요 원인이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동물찻길사고 5300건 중 4426건이 고라니였다. 전체의 83.5%다. 너구리, 멧돼지가 뒤를 잇는다.
도로공사는 지난달 28일, 5~6월은 야생동물의 활동량이 늘어나는 시기라며 운전자 주의를 당부했다. 같은 기간 고속도로 로드킬 사고는 전체의 37.1%인 1967건이 발생했다. 시간대로는 자정부터 오전 8시 사이가 가장 많았다. 전체 사고의 44.4%를 차지했다.
봄철에 사고가 집중되는 이유는 고라니의 생태 습성과 관련 있다. 상위 포식동물이 없는 상태에서 개체 수가 많고, 먹이 활동과 새끼 양육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도로공사는 사고 예방을 위해 운전자가 도로 전광표지판이나 야생동물 주의 표지판을 본 경우 전방주시와 규정 속도 준수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행 중 야생동물을 발견했을 때는 핸들이나 브레이크를 급히 조작하지 말고, 경적을 울려 소리로 경고한 뒤 통과할 것을 권했다. 단, 상향등 사용은 동물의 돌발행동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충돌 시에는 비상등을 켜고 트렁크를 열어 사고 차량임을 알린 뒤 가드레일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 이후 한국도로공사 콜센터(1588-2504)에 신고하면 안전하게 사고 수습이 가능하다.
도로공사는 해마다 유도 울타리도 확대 설치 중이다. 현재 전국 고속도로에 설치된 유도 울타리는 3123㎞에 달한다. AI 기반 생태통로 모니터링 시스템도 도입해 24시간 야생동물 이동을 감시하고 있다. 생태복원 사업도 병행 중이며, 2015년 2545건에 달했던 로드킬 사고는 2024년 783건으로 69% 이상 줄었다.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된 고라니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고라니를 ‘멸종 취약종(VU)’으로 등록했다. 서식지 파괴, 불법 포획 등의 이유로 멸종 위험이 있는 종이다. 적색 목록엔 멸종(EX), 자연 멸종(EW), 멸종 직전(CR), 고위험 멸종 위기(EN), 멸종 취약종(VU) 등의 등급이 있다.
중국 저장성, 장쑤성, 후난성 등에선 약 1만~3만 마리의 고라니가 남아 있다. 도시화와 서식지 파괴, 밀렵 때문에 개체 수가 줄고 있어 중국 정부는 고라니를 보호종으로 지정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표범의땅 국립공원에서도 2019년 고라니가 처음 발견됐고, 현재는 약 170마리로 개체군이 늘어난 상태다.
영국은 19세기 말 고라니를 동물원과 사슴공원 등에 들여왔다. 이후 일부 개체가 탈출해 잉글랜드 동부 지역에서 야생 정착에 성공했다. 고라니는 습지나 갈대밭 같은 습윤한 환경에서 잘 살아남는다.
2020년 임페리얼칼리지 런던과 영국사슴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 개체군은 중국 본토에서 멸종한 유전형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보전 연구와 유전적 다양성 확보에 활용 가능성이 있다.
고라니, 한국에선 포획 대상… 세계에선 보존 대상
한국은 고라니를 유해 동물로 지정하고 개체 조절에 나선 상황이다. 반면 국제 사회는 고라니의 보존과 유전자 보호에 주목한다. 같은 동물을 두고도 국가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고라니 외교'라는 말까지 나온다. 중국이 판다를 외교 전략에 활용하듯, 한국도 고라니를 활용하자는 농담이다.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발상이 나오는 건, 고라니가 처한 이중적 현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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