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은 한국 경제의 상징이자, 재벌 지배구조 논란의 중심에 있다.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의 중추에는 늘 삼성생명이 자리해왔다. 단순한 금융회사를 넘어 그룹 핵심 계열사를 연결하는 심장이자 총수 일가의 지배력 유지를 가능하게 한 실질적 고리 역할을 해온 셈이다. 2005년 금산분리법 개정과 순환출자 해소 논란이 뜨거웠던 그때도, 2025년 삼성생명법이라는 입법 논쟁이 존재하는 지금도 삼성생명은 여전히 삼성 지배구조의 심장부에 있다. ‘삼성의 생명’ 시리즈를 통해 삼성생명이 20년 넘게 지배구조의 생명선이 된 배경과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삼성생명법을 둘러싼 논쟁을 짚어본다.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삼성생명법은 국회에서 10년 넘게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통과되지 않고 있다. 글로벌 회계기준과의 괴리, 보험업계 내부의 지분 위험 관리에 대한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국회 문턱은 높기만 하다.
이는 해당 법안이 삼성의 지배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과 삼성 모두가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보험업법상 취득원가 평가로 인해 실제로 법적 규제의 실질적 수혜를 받는 곳은 삼성생명 뿐이다.
주식을 시가가 아닌 취득원가로 평가하는 제도로 인해 삼성생명은 시가 기준 30~40조원에 달하는 삼성전자 지분(8.5%)을 총자산의 3% 한도 규제를 피한 채 보유할 수 있다. 실제 삼성생명이 1980년대에 매입한 삼성전자 주식의 취득원가는 약 540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글로벌 스탠다드‘된 시가 평가…삼성만 ‘예외적 잣대’
2023년 1월 1일부터 IFRS17(국제회계기준 17호)이 전 세계 140여 개국에서 도입되서, 보험사의 자산과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것이 국제적 기준으로 정착됐다. 이 기준은 보험 계약의 수익성과 리스크를 보다 정밀하게 반영함으로써, 보험사의 재무제표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국내 보험업법은 여전히 보유 주식에 대해 ‘취득원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로 인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을 시가가 아닌 취득 당시의 원가 기준으로 평가받으며, 자산운용 규제에서 사실상 면제되는 예외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생명의 지급여력비율(RBC) 역시 삼성전자 주가에 따라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말 기준 삼성생명의 RBC는 193.5%로, 2분기 대비 8%포인트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삼성전자 주가 하락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이러한 지배구조 유지가 ‘이중 기준’에 의해 가능하다는 데 있다. 보험사의 총자산은 시가로 산정하면서도, 주식 보유액은 취득원가로 계산하는 구조에서다. 이처럼 법적 규제를 우회할 수 있는 구조가 삼성만의 ‘룰’로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재벌그룹들은 정리한 구조…금융-비금융 분리 추세
반면 현대차, SK, 한화 등 주요 재벌 그룹은 이미 금융-비금융 계열사 간 연결 고리를 끊은 상태다.
현대차그룹은 현대해상과의 지분 관계를 정리했고, SK그룹은 SK증권을 매각해 금융계열사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한화그룹 역시 한화생명을 통해 보유하던 비금융 계열사 지분을 정리하며, 금융-비금융 분리를 추진했다.
삼성만이 보험사를 통한 비금융 계열사(삼성전자) 지배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로 남은 것이다.
사실 삼성 내부에서도 보험업법상 규제가 그룹 지배구조에 미칠 영향을 오래전부터 인식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공개된 2012년 삼성 미래전략실 문건에는 “금산분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정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해당 문건은 삼성전자 자사주 매입, 순환출자 해소, 지배구조 개편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 내부에서는 오래전부터 해당 지분이 그룹 지배구조에 미칠 리스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공식적 입장에서는 시장 충격, 보험계약자 피해, 외국인 경영권 위협 등 기존 논리를 반복하며 법안 통과에 반대해왔다”고 분석했다.
법안 통과보다 사회적 합의 이뤄져야…“결국 삼성의 의지”
삼성생명법은 2014년 19대 국회 첫 발의 이후 20대, 21대, 22대 국회까지 네 번이나 상정됐지만 단 한 번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19대 국회에서는 상임위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고, 20대 국회에서도 여야 간 이견과 정부 부처의 신중론 등으로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가 중단됐다. 21대 국회에서는 박용진·이용우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이 정무위원회에 상정됐으나, 예산안 파행 등의 이유로 또다시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도 논의는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정치권 내부의 찬반 대립, 시장 충격, 보험계약자 보호 논란 등 현실적 우려가 법안 통과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은 반대 논리만 반복했을 뿐,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나 사회적 책임 이행 등 적극적 해법을 제시하거나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최근 법안 발의 기자회견에서 “법안에는 5년 유예, 단계적 매각, 금융당국의 추가 연장 등 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장치가 이미 포함돼 있다”며 “지난 10여 년간 이 법안이 통과되지 않은 이유는 논리적 싸움이 아니라, 삼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삼성의 공포 마케팅의 핵심은 ‘삼성전자 주가가 떨어지면 책임질 거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삼성생명법이 통과되면 삼성생명 주주와 유배당 계약자, 본사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며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 가치가 크게 올라, 삼성의 지배구조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결국 삼성생명법의 입법 여부는 기술적 문제보다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삼성생명법이 특정 기업을 정조준한 법이라는 반대 논리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공정한 자본시장과 책임 있는 지배구조 확립이라는 대의에 더 방점이 찍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회 관계자는 “지금까지 10년 넘게 입법이 좌초된 건 정치권이나 당사자인 삼성 모두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결국 삼성의 결단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방송통신대 법학과 조승현 교수도 “삼성은 IMF 위기를 비롯, 국가와 국민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기업이지만 그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며 “삼성생명법 논쟁은 법안 통과 여부를 넘어 한국 자본시장의 공정성과 보험계약자 보호, 사회적 책임이라는 더 큰 사회적 합의의 문제로 자리 잡은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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