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기생식물. 작물 뿌리에 달라붙어 양분을 빨아들이며, 제초제에도 끄떡없이 농업을 위협해온 존재다. '식물계의 흡혈귀'로 불리는 이 기생식물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농업 현장에서 수확량을 절반 가까이 낮추며 오랫동안 피해를 입혀왔다.
그런데 이 끈질긴 생존 전략을 역으로 이용해, 숙주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뒤 스스로 고사하게 만드는 방식이 과학자들에 의해 개발됐다.
기생식물은 '스트리골락톤(strigolactone)'이라는 식물 호르몬을 감지해 발아한다. 이 물질은 원래 식물이 뿌리를 통해 분비하며 생장을 조절하고, 토양 속 유익균을 유인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기생식물에겐 이 호르몬이 "숙주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로 작용한다. 스트리골락톤 하나만으로, 기생식물은 발아 시점과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미국 UC 리버사이드(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연구팀은 이 메커니즘을 정면으로 공략했다. 작물이 없는 토양에 스트리골락톤만 인위적으로 뿌리자, 기생식물은 숙주가 있는 줄 알고 서둘러 발아했다. 그러나 흡착할 뿌리가 없자 며칠 만에 스스로 말라 죽었다.
이번 연구는 미국 UC 리버사이드 식물병리학과 연구팀이 진행했으며, 그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됐다.
"우리는 기생식물을 억지로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유도했을 뿐입니다."
연구를 이끈 식물병리학자 벤자민 파커(Benjamin Parker) 교수는 이 전략을 '식물 간 커뮤니케이션을 조정한 생태적 역이용'이라고 표현했다. 단순한 살포가 아니라, 기생식물의 오랜 진화 전략을 정밀하게 역전시킨 과학적 트릭이었던 셈이다.
이 전략은 기존의 제초제처럼 작물에 부작용을 주지 않으며, 기생식물만 정밀하게 겨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전자 조작이 필요하지 않아 기술 접근성이 높고, 생태계 교란 우려도 적다. 특히 연구팀은 대장균과 효모를 활용해 스트리골락톤을 생물학적으로 합성하는 기술도 개발해, 지역별 환경에 맞는 맞춤 조성비 조정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용화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기생식물은 수수, 옥수수, 벼 등 주요 곡물에 감염돼 심각한 피해를 유발하며, 개발도상국에서는 직접적인 식량 안보 위협 요소로 꼽힌다. 이번 연구는 이 같은 피해를 줄일 친환경적이고 비용 효율적인 대안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구팀은 현재 다양한 작물과 토양 환경에서 이 전략의 적용 가능성을 시험 중이다. 스트리골락톤의 농도, 분비 시점, 지역별 토양 성분에 따른 반응 차이를 분석해 맞춤형 방제 솔루션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이다.
파커 교수는 "기생식물은 진화적으로 영리한 존재지만, 그 신호 하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건 결국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며, "이번 연구가 기생식물 방제를 넘어, 생태적 신호 조작을 활용한 차세대 농법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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