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는 금융의 영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자금의 흐름에 따라 가정의 살림살이부터 기업의 흥망, 국가 경제의 성패까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금융권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를 소개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짚어보려 합니다. [편집자주] |
[직썰 / 안중열 기자] 금융권의 ‘이자놀이’는 단순한 탐욕의 결과가 아니다. 혁신에 실패한 산업이 생존을 위해 퇴보를 택한 결과다. 대출금리와 예금금리 차이, 이른바 ‘예대마진’은 금융사의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가장 퇴행적인 수익 구조로 고착됐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4년 한국 은행들의 예대금리차는 2.1%포인트에 달했다. 이는 OECD 평균(약 1.2%포인트)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금융산업이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사이, 소비자 부담만 커졌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이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도 실질적 제도 개선보다 수치 관리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 고금리, 고령화라는 삼중 압박 속에서 금융산업은 과거 방식에 집착하며 스스로 진화를 거부하고 있다. 서민은 깊은 시름에 빠졌고, 이를 대변하듯 이자수익 구조에 대한 외부 비판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대출을 통한 즉각적 수익을 포기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당국 역시 혁신 압박은 반복하지만, 은행들의 리스크 부담을 분산할 실질적 지원책 마련에는 소극적이었다.
◇ 비이자수익 다변화, 구호만 요란하고 성과는 부진
5대 시중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 2024년 사상 최대 이자수익을 기록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총 이자수익은 90조원을 넘어섰고, 전년 대비 평균 8.3% 증가했다.
은행들은 매년 ‘비이자수익 다변화’를 외쳤지만, 실질 성과는 여전히 미미하다. 전체 영업이익에서 비이자수익 비중은 13%에 머물렀다. 글로벌 대형은행 평균(30~35%)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출처: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2024 Global Bank Survey)
신한은행 관계자는 “디지털 플랫폼 ‘신한플러스’를 확장했지만, 금융소비자들의 보수적 성향과 규제 불확실성 때문에 기대한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나은행 고위 관계자는 “핀테크 신사업을 출시할 때마다 내부 리스크 관리 부담과 규제 대응 부담이 커져 사업 속도가 느려진다”고 밝혔다.
이처럼 규제 환경의 불확실성과 관료적 심사구조가 혁신 프로젝트의 추진을 가로막고 있다. 금융당국은 규제 일관성 확보나 테스트베드 확대 등 적극적 뒷받침을 약속했지만, 현실에서는 절차적 지연과 사후 규제만 늘어나 오히려 시장 혼란을 키웠다.
◇단기 수익 집착이 혁신을 가로막는다
자산관리(WM)나 글로벌 리테일 확장에는 대규모 선투자와 장기적 관점이 요구된다. 반면 예대마진은 즉각적 수익을 보장한다. 이 구조적 차이가 금융사 경영진을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단기성과 중심 사고에 몰아넣는다.
2024년 한국 시중은행 평균 ROE는 약 9%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평균(약 7%)을 웃돌았다. 그러나 장기 투자 지표(예: R&D 투자비율)는 여전히 낮다. (출처: OECD Economic Outlook 2024)
한국금융연구원은 “한국 금융권은 ROE를 과도하게 중시하는 관행에 갇혀 있다”며 “장기 혁신 투자마저 비효율로 간주하고, 결과적으로 예대마진 중심 영업만 강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금융당국도 비이자수익 확대를 주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은행 내부 인센티브 체계부터 철저히 개혁하고, KPI를 비이자수익 성장률, 신사업 매출 비중, 혁신 상품 출시 실적, 글로벌 시장 확장 지표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혁신 실패를 불이익이 아닌 도전으로 평가하는 조직 문화를 확립하고, 단기성과 보상 대신 장기성과에 연동하는 ‘지분보상 체계(ESOP)’를 도입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이러한 내부 인센티브 재설계까지 포함해 제도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개별 은행의 성과와 연계한 평가도 필수다.
한 은행 임원 역시 “단기성과를 기준으로 평가받는 환경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라도 장기 투자를 추진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금융은 무너진다
금융권은 비이자수익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본능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단기 수익성 악화, 소비자 보호 약화 등 다양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통은 예견된 과정이다.
비이자수익 비중이 20%를 초과하면 신용등급 상향, 자기자본비율 규제 완화 혜택을 제공해야 하고, 핀테크 및 소매금융 투자에 대해 법인세 세액공제 제도를 신설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명확하고 유인책이 있는 정책 패키지를 마련해야 한다.
혁신 금융상품 심사 절차를 간소화하고, 동시에 핀테크 리스크와 초개인화 부작용을 예방할 금융소비자 보호 가이드라인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비이자수익 확대를 성공시키려면 금융회사에 명확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규제 완화와 소비자 보호장치를 동시에 강화해야 시장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권은 이제 ‘익숙한 이자수익에 안주하며 퇴보할지’,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진화를 선택할지’를 정확하게 선택해야 한다. 금융당국 역시 구경꾼이 아니라, 변화를 촉진하는 적극적 설계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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