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안보 홀로서기’ 나선 유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80년간 유지됐던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2기 출범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 과정에서 서유럽의 오랜 적국인 러시아와 밀착했고, 유럽 또한 ‘안보 자강’을 외치며 미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80년 된 대서양 동맹 뿌리째 흔들려
그동안 유럽의 안보는 미국이 주도하는 집단 안보 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책임졌다. 나토를 주축으로 한 대서양 동맹은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질서와 방어를 도모하고 대소련 공동 전선으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등지고 러시아를 국제무대로 복귀시키려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로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백악관 회담이 최악의 결말을 맞은 뒤 유럽 외신들은 이를 ‘대서양 동맹의 종말’로 평가했다. 영국 가디언은 “외교적 재앙을 넘어 국제 질서의 붕괴를 예고하는 순간이자 ‘팍스 아메리카나’가 저물어가는 시기의 시작”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 르몽드는 “우크라이나와 미국 간 관계의 결정적 분수령”이라며 “푸틴은 미사일 한 발 쏘지 않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됐다”고 평가했다.
사실 대서양 동맹의 파열음은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안보 무임승차론’을 꺼내 나토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 바 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밀착하는 데다, 유럽연합(EU)을 향해 “미국을 뜯어먹으려 생겨났다”고 적대감을 드러낸 최근 상황은 당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에 유럽에선 불안과 조바심이 뒤섞인 격앙된 반응도 이어지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이 미국에 종속돼선 안 된다”고 전했고,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자유 세계에 새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 국가들은 안보 자강 논의에 나서고 있다. 군사력을 끌어올려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추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 낮은 수준으로 유지된 유럽 국가의 군사력을 단기에 끌어올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영국의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2025 군사력 균형’을 보면 지난해 유럽의 나토 회원국 전체 국방비(4,570억 달러)를 합쳐도 미국의 국방비(9,680억 달러)에 한참 뒤처지는 수준이다.
정보나 방공망을 미국의 군사 지원에 크게 의존해 온 유럽이 독자적으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대서양 동맹 내 역할 분담에서 미국이 군의 정교한 시스템과 응집력 제공을 전담해 왔기에 유럽으로선 방위비를 늘리는 것으로는 이런 역량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유럽 정상들은 미국의 후방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강조함과 동시에 안보 홀로서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EU 회원국 방위비 증액을 촉진하기 위해 최소 8,000억 유로의 자금 동원 방안 등을 담은 ‘유럽 재무장 계획’을 제안했다. 개별 회원국이 국방 부문에서 공공자금을 적극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EU 재정준칙 적용을 유예하는 국가별 예외 조항을 발동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러시아는 EU의 재무장이 자국을 겨냥한다고 보고 반발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대통령궁) 대변인은 “유럽이 군사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일종의 전쟁 파티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EU가 경제 동맹에서 군사 동맹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며 유럽의 국방 강화는 러시아에 잠재적 위협이라고 못 박으며 러시아 역시 대응책을 강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유럽의 재무장은 러시아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군사화를 더욱 촉진할 수도 있다. 이에 따른 군비 경쟁과 역내 추가적인 긴장 고조 가능성도 변수다.
‘재무장’ 갈 긴 먼 유럽
‘자체 핵무장론’ 논의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나라는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이다. 총선 승리로 차기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는 “우리 유럽은 핵 억제력에서 함께 더 강해져야 하고, 이를 위해 핵무기 공유를 논의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앞서 총선 승리 직후에도 “영국, 프랑스와 함께 핵 공유 혹은 핵 방위 적용을 논의해야 한다”며 ‘유럽 자체 핵 방위’를 언급하기도 했다. 독일은 그동안 군사 정책에서 극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미국 및 나토 동맹국과의 집단 안보에 의지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지난해 최초로 ‘국가 안보 전략’을 발표했고, 이제는 차기 지도자가 직접 ‘핵무장 필요성’을 언급하는 상황이 됐다.
독일의 이웃 국가 폴란드에서도 핵무장론이 힘을 얻고 있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에 폴란드 영토로 핵무기를 이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토 핵 공유 협정에 따라 미국은 유럽 방위를 위해 나토 회원국 일부에 전술핵을 배치하고 있는데, 현재 벨기에와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튀르키예 5국에 제한적으로 배치된 핵무기를 폴란드까지 확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도날트 투스크 총리 역시 “러시아가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미국은 유럽 핵 안보 우산을 축소하고 있다”며 자국 내 핵 배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프랑스 역시 ‘유럽 핵우산’ 논의 주도를 시작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핵무기를 통한 전쟁 억지력을 통해 국가 안보를 지켜왔다”며 “프랑스가 보유한 핵 억지력에 대한 논의를 유럽 차원에서 확대할 의사가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결정에 철저히 따랐던 기존 나토 핵 공유 시스템을 대신해 프랑스가 미국의 자리를 물려받아 유럽 안보를 진두지휘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이다.
마찬가지로 핵보유국인 영국은 정치권에서도 자체 핵무장 논의가 분출하고 있다. 키어 스타머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군비 증강 주장에 대해 명확히 선을 긋고 있으나 이번 기회에 미국 의존도를 줄이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매닝 전 주미 대사 등 외교계 인사 네 명은 “트럼프가 영국과의 핵 협력 협정을 끝낼 수도 있고, 미국의 약속이 너무 모호해져서 나토 상호 방위 조항이 더 이상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며 핵을 포함해 주도적인 군비 증강 계획 수립을 촉구했다.
하지만 실현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럽 핵무장 구상을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유럽 핵우산’의 범위에 폴란드나 발트 3국 등 동유럽까지 넣을지, 혹은 프랑스의 안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독일 등 인접 국가들만 넣을지 의견이 분분하다. 자칫 나토와 유럽연합 내 동·서유럽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러시아와 비교가 되지 않는 전력상 열세도 자체 핵무장의 걸림돌이다. 프랑스는 약 290기의 핵탄두를 가지고 있으며 영국은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정도만 225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약 5,600기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EU에 예고한 전면적 관세 부과가 현실화해 경제에 심각한 타격으로 이어진다면 방위비 지출을 늘리기 더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유럽을 이끌 마땅한 구심점이 없다는 점도 한계로 지목된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조기 총선에서 참패해 사실상 레임덕에 빠졌고, 독일은 정권교체기에 놓여있다. 그나마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는 평가를 받는 스타머 영국 총리가 최근 주도적 역할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대통령’으로도 불리며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에 맞섰던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에 비하면 무게가 떨어진다는 평가가 다수다. 트럼프 대통령의 ‘힘의 외교’가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가운데, 유럽이 미국 없이 독립적인 안보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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