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는 근대화를 위한 7개의 필수요소를 도출한 다음 조선의 제반 상황들을 일본과 서유럽의 제반 상황과 비교했다. 근대화의 필수적인 7개의 요소를 들여다보면 그 사회의 속살이 다 보인다. 넉넉한지 궁핍한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회인지 고리타분한 전근대 사회인지가 읽힌다. 문화도 보인다. 일본의 7개의 필수요소는 일본의 문화를, 조선의 7개의 필수요소는 조선의 문화와 실체를 다드러낸다.
독일의 역사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에 따르면 19세기에 서유럽이라 함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우수 사례들을 합친 것’이다. 이 3개국은 세계 대부분 지역의 표본이자 평가척도가 됐다. 한국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일본과 미국을 포함하면 5개국이 벤치마킹 대상이다.
교육, 인프라(도로, 철도, 통신), 민간 출판문화, 헌법 제정 등을 선진국들과 비교해보고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지난 역사적 사실이 매우 쓰라린 일이나 우리들 자녀와 손주 세대를 위해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다. 7개의 필수요소는 다음 3단계로 묶을 수 있다.
1단계는 신분해방과 함께 의무교육·징병제·조세제도라는 근대화의 필수요소인 세 가지 정책이다. 근대화의 기초는 의무교육의실시, 징병제, 근대 조세제도라는 세 가지 정책이 균형을 이루어야한다. 근대라는 새로운 사회에 맞는 근대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학교와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규범화하고 교화해야 했다.
근대는 한마디로 보편적인 가치와 각국의 특수한 가치가 학교를 통해 제도화되는, 이반 일리치가 말한 일종의 ‘학교화된 사회schooled society’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교육은 모든 분야와 연결되는 연결축(결절점)이다. 일반 국민이 문맹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농사나 단순 노동 이외에는 없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기술이나 제도에 대한 이해와 계몽이 불가능하다. 산업사회, 기술, 근대적 개인의 탄생, 도시화를 지향하는 근대화 사회에서 문자 해독은 매우 중요하다. 군대에서도 글씨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국민에 대한 의무교육은 전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엔진에 해당한다. 여기에 국가관과 국가의 정체성
을 형성하기 위해서도 일반인에 대한 교육은 필수적 사안이다. 하지만 보통교육의 의무화는 1880년 전까지 소수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만 시행됐다. 서유럽에서 19세기 말의 커다란 성취 중 하나는 초등·중등·고등교육의 중대한 재조직이었다. 교육의 체계화는 그 자체로 엄청난 진보의 결과였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아이들에게 노동을 시키지 않고 10년에서 16여 년 동안 오직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 의무교육 제도는 엄청난 발전과 진보의 결과물이다.
2단계는 H형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H의 한 축으로 하드웨어는 도로, 철도, 상·하수도, 통신 등이다. 이건영 전 국토연구원장은 “국토는 단순한 흙이 아니라 생산의 바탕이고 삶의 그릇이다. 그 위에 그리고 그 밑에 인프라가 깔린다.”라며 “국토 위에 세워진 교통, 통신, 에너지, 의료, 물관리, 교육시설 등의 물리적 가치가 생산을 지원하고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게될 때 비로소 땅은 경쟁력을 갖게 된다.” 라고 인프라를 강조했다.
더이상 덧붙일 게 없는 가장 멋진 인프라에 대한 정의다. 인프라는 ‘국력이자 국부’다.
H의 또 한 축으로 소프트웨어인 출판·언론문화가 활발해지면서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확대됐다. 근대화는 기본적으로 속도혁명을 불러온 철도의 시대이자 지식과 정보의 폭발적인 증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가져온 신문과 잡지의 시대였다. 도널드 서순에 의하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신문과 잡지는 온갖 종류를 망라해 2만5,000종이 넘었다. 결국 유럽의 승리는 인쇄물의 승리였다. 서유럽 전역이 신문과 각종 인쇄물로 가득한 세상이 되면서 낡은 중세가 도태되고 사회 구조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창조적 파괴’의 순간에 도달한 것이다. 또한 교육제도, 징병제, 조세제도, 출판문화의 자유 등 이런 것들은 복합 과제들로 과제 간 연계성이 크다. 특히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공론장을 형성하는 언론 기능은 정상적인 근대 국가의 필수요건이었다.
마지막 3단계는 근대적 시장경제 제도의 정착, 소유권의 보장, 근대적 기업 제도와 상법, 거래 안전성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 등으로 재산권을 보호하고 법치사회가 정착되도록 뒷받침하는 것들이다.
사유재산과 개인의 권리가 법으로 보호되지 않으면 누구도 모험을 통해 부를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불안한 사회에서는 권력의 친소관계에 따라 뒤웅박 신세라 사회적 부가 증가할 수 없다. 이건 최소한의 과제다. 과제를 마치지 못한 국가는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3단계를 거치고 나면 음속을 돌파한 나로호처럼 완전히 다른 가속도의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이 3단계의 7개의 과제를 제대로 마친 국가는 이륙했고 가속도의 근대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7개의 과제는 근대화에서 필수요소로 축약할 수는 있으나 생략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선진국들이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근대화 시기에 제기했던 심원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우리 스스로 응답하고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세 가지 힘’에 관해 설명한다.
한국 경제의 사이클상 구조적 전환기 진입, 중장기 저성장 기조 고착화, 미·중 패권전쟁, 인공지능 기반 4차 산업혁명 본격화 등으로 대변되는 급격한 내외부 환경이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힘이 중요하다.
첫째, 강한 파워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수평사회, 즉 병렬파워가 장착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권력이 비대해지면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며 사회는 경쟁력을 잃게 된다. 정치, 경제, 언론, 교육, 과학기술, 종교, 시민단체 등 각자 전문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약 12종의 다원적인 병렬파워 단위들이 건강하게 형성돼야 한다.
병렬파워의 대표 사례는 미국을 들 수 있다. 미국 인구는 3억3,400만 명(2022년 기준)으로 세계 3위다. 세계 최고의 경제, 기술,군사, 문화를 이끌고 있지만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마약중독, 총기사고 등 사회에 짐이 되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다. 그러다 보니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왜곡된 이념의 렌즈로 들여다보고 미국의 쇠퇴로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다. 어느 나라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민주적 절차가 때론 허점이 많더라도 12개의 병렬파워를 모두 대입해서 하나씩 점검해 봐야 한다. 세계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미국을 방문한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 세계 공연의 메카 뉴욕브로드웨이, 세계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 뉴욕 양키즈를 비롯한 각종 스포츠(야구, 농구, 미식축구), 하버드대학교, 백악관, 「뉴욕타임스」, 라스베이거스, 실리콘밸리, 미국자연사 박물관 등 이 모든 게 병렬파워다. 미국은 이것만 강한 게 아니다. 국방 예산이 1,000조 달러라고 해서 천조국이라 불릴 정도의 절대 군사 강국이고,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국가이고, 각종 시민단체 활동이 활발한 나라다. 한마디로 미국은 모두 강하다. 대통령도 강하고 군대도 강하고 언론계도 강하고 영화계도 강하고 대학도 강하다. 미국은 골고루 다 갖춘 병렬파워의 ‘종합선물세트’다.
자연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병렬파워의 각 주체가 건강해야 하며 역동성이 매우 중요하다. 4부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병렬파워 현황과 세부적으로 병렬파워가 얼마나 원활히 작동하고 있는지살펴보았다.
둘째, 지속적인 부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혁신생태계를 구축하여 생태계 차원에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성과가창출된다. 남들이 다 하는 것, 모방으로는 이제 답이 없다. 고령화,고임금을 감당할 수 있는 혁신생태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1인당 국민소득 10만 달러, 15만 달러의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고 거기에 적합한 인재들을 육성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국가 생태계 간 경쟁력이 더 중요해졌다. 초일류 전쟁터의 게임
룰은 약육강식이 아니라 ‘훌륭한 생태계를 누가 더 많이 갖고 함께 성장하느냐’의 게임이다. 미래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고 기업,대학, 공공 연구기관 등 혁신을 수행하는 주체들 간에 아이디어, 연구비, 인력의 흐름이 원활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생존과 발전이 가능하다.
오픈AI의 챗GPT와 구글의 바드와 같은 인공지능은 시장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챗GPT와 바드를 협력해서 개발한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글로벌 빅테크들은 인공지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들이 잘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열린 생태계’를 꼽고 있다. 판을 크게 키워 지속해서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다. 분명히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생태계를 풍성하게 해서 크게 먹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혼자서 이익을 독식하는 단기필마형 경영을 선호한다.
혁신생태계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픈소스 프로젝트다.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소스코드를 인터넷을 통해 무상으로 공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오픈소스에 기여하고 후원하는 문화, 즉 열린 생태계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대범하게 이런 인식을 깨는 대기업 경영자가 나와야 한다. 이제 세상은 이미 오픈소스가 점령했다. 모든 세계적 기업은 오픈소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도 ‘의식의 베이스캠프’
를 올려야 한다.
셋째, 사회를 통합하고 보편적 가치를 통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코어심벌을 어떻게 형성하고 유지해야 하는가? 병렬파워로 실현되는 권력과 혁신생태계로 형성되는 부라는 두 바퀴가 잘 굴러가도록 린치핀linchpin 역할을 하는 코어심벌을 잘 정립해야 한다. 그러면 선진문명으로 향할 수 있다. 린치핀은 본래 ‘마차나 자동차의 두 바퀴를 연결하는 쇠막대기를 고정하는 핀’을 의미한다. 비록 작은 부품이지만 린치핀이 없이는 바퀴를 지탱할 수 없어 결코
멀리 갈 수 없다. 코어심벌이라는 핵심 가치가 부재하고 흔들리면서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은 위협받고 있고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다. 인공지능 등 새로운 사회의 출현으로 인해 반드시 리스크가 생기기 마련이다. 코어심벌은 그 위험도를 낮추는 필수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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