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전 세계 전자폐기물이 6천만 톤을 넘어서고, 해외에선 ‘수리할 권리’를 외치며 전자폐기물 감축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제자리다. 고장난 제품은 버려지고 소비자는 새 제품을 살 수밖에 없고 기업은 ESG를 말하고 정부는 순환 경제를 외치지만 정작 소비자가 고쳐 쓸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과 유엔훈련조사연구소(UNITAR)가 발표한 ‘글로벌 전자폐기물 모니터 2024’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전자폐기물은 약 6200만 톤으로 재활용률은 22.3%에 그쳤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녹색연합이 2023년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구는 평균 63개의 전기·전자제품을 보유, 이 중 13.8개는 사용되지 않고 2개는 고장 상태로 방치돼 있다.
전자폐기물 문제가 심화하면서 제품을 고쳐 쓰는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수리할 권리’가 주목받고 있다.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가 제품을 직접 수리하거나 제삼자를 통해 수리할 수 있도록 부품과 수리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다.
한국은 서비스센터 접근성이 좋은 편이지만 모든 소비자가 합리적인 조건에서 수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보증기간이 지난 제품은 수리비가 신제품 가격의 절반을 넘기도 하고, 구형 모델은 부품 단종으로 수리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는 고쳐 쓸 ‘선택권’ 없이 새 제품 구매를 강요받는 분위기다. 수리할 권리는 제품 수명을 연장하고 자원순환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보장하는 데 의미가 있다. 자가 수리 권리가 실질화되면 소비자는 고비용 수리 부담을 줄이고, 제품을 더 오래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기업들도 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전략은 극명하게 갈린다. 삼성전자는 2023년 5월부터 국내에서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초기에는 갤럭시 S20·S21·S22 시리즈와 갤럭시 북 프로 노트북 일부 모델에 한정했지만 같은 해 12월부터 폴더블폰(Z 플립5·폴드5), 갤럭시 탭 S9, 갤럭시 북2 시리즈 등으로 확대했다.
TV, 사운드바, 모니터, 프로젝터 등 홈 엔터테인먼트 제품까지 추가되면서 현재 50여 개 모델이 자가 수리 대상에 포함됐다. 삼성전자는 정품 부품과 수리 도구와 공식 매뉴얼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수리 후 삼성 멤버스 앱을 통한 자가 진단도 지원한다. 이는 해외 규제 대응과 함께 국내 소비자 선택권을 넓히려는 전략적 조치다.
반면 LG전자는 미국 등 해외에서 ‘LG Parts’를 통해 일부 가전제품 부품과 수리 가이드를 제공하지만, 국내에서는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는다. 국내 소비자는 공식 서비스센터를 통해서만 부품을 구매하거나 수리를 받아야 한다. ‘퀵헬프’ 앱과 고객지원 서비스도 단순 자가 진단 수준에 그친다.
LG전자 관계자는 “전국 서비스망을 기반으로 수리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며 “고전압 제품의 안전성 문제를 이유로 기존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2년 ESG 경영 전략에서 ‘순환성(Circularity)’을 핵심 과제로 내세운 LG전자는 수리성과 자원 재활용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정식 부품이나 수리 매뉴얼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 ESG를 내세우면서도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글로벌 IT 기업 애플은 자가 수리 정책 변화를 주도한 사례로 꼽힌다. 애플은 2021년 ‘자가 수리 서비스(Self Service Repair)’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2022년부터 미국에서 아이폰 12·13 시리즈를 대상으로 정품 부품과 수리 도구나 공식 매뉴얼을 제공했다.
이후 맥북 제품군에 이어 유럽 지역으로도 자가 수리 서비스를 확대했다. 수리 과정에 일련번호 등록이나 ‘시스템 구성’ 도구 활성화 같은 복잡한 절차는 남아 있지만 인프라 자체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애플이 이 같은 변화를 추진한 배경에는 EU 규제 강화와 미국 내 소비자 권리 확대 움직임을 의식한 결과로 풀이된다. 다만 애플의 자가 수리 프로그램은 현재 한국에 도입되지 않아 국내 소비자는 여전히 공인 서비스센터를 통해 수리에 의존해야 한다.
EU는 수리 용이성을 평가하는 지수 표시제와 주요 부품의 최소 제공 기간 7~10년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관련 지표나 기준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2025년부터 시행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과 환경부 시행령이 수리할 권리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지만, 핵심 조항들이 ‘노력 의무’에 그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가 수리 정보 제공도 강제되지 않고, 부품 제공 대상은 부품 보유 기간 3년 이상인 공산품으로 한정됐다. 수리 정의나 정보 공개 방식도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아 소비자가 실제 권리를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자 업계 관계자는 “최근에 직접 부품을 구매해 제품을 수리하려는 소비자들도 늘어나고 있어 단순히 서비스센터 의존이 아니라 소비자가 수리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하는 측면에서도 자가 수리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환경연합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의 수리할 권리는 ‘노력 의무’에 머물러 실질적 강제력이 부족하고, 자가 수리와 수리 용이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도 마련되지 않았다”며 “기업 의무 강화와 제품 수명 연장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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