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치료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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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원 칼럼] 치료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③

문화매거진 2025-04-25 17:12: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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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원 칼럼] 치료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②에 이어 
 

▲ 여느 때처럼 정처 없이 걷다가 만난 풍경. 워크 워크 밸런스(work-work balance)에 워크(walk)를 더하면 삶이 더없이 풍요로워질 것 같다 / 그림: 정혜원
▲ 여느 때처럼 정처 없이 걷다가 만난 풍경. 워크 워크 밸런스(work-work balance)에 워크(walk)를 더하면 삶이 더없이 풍요로워질 것 같다 / 그림: 정혜원


[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작업은 항상 나를 구원한다. 힘든 현실과 다친 마음에 작업이 직접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놀지 않고 무언가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로가 된다. 내 작품은 노동 집약적인 것이 많다. 전문 업체에 맡기면 간단한데도 굳이 손으로 만든다든지, 작은 그림 한 장을 그릴 때도 수많은 디테일을 추가한다든지. 혹사에 가까울 만큼 쉼 없이 몸을 움직여야 비로소 불안이 가신다. 조금이라도 쉽게 작업하면 왠지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성에 차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보잘것없는 작품에 괜한 수고를 들인 것 같아서 기분이 울적해진다. 내 존재마저 보잘것없게 느껴지곤 한다. 반면 완성된 작품이 마음에 들 때면 한없이 뿌듯하다. 나 자신이 기특하고, 왠지 앞으로도 계속 괜찮은 작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작 작품 하나 때문에 이처럼 희비를 오가는 것이 우습지만, 무언가 하고 있다는 위안은 너무도 달콤하다. 그래서 길을 잃어 힘들 때면 앞뒤 재지 않고 언제나 작업으로 도망쳐 든다. 정신과 상담과 약물을 끊고 불안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연필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도 나지 않았지만 일단 선 하나라도 긋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 하나를 그으니 역시 선 하나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여러 가닥의 선이 어우러져 갖가지 형상을 이루며 나를 평온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내 경우, 진정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는 작업만 해서는 안 된다. 돈이 벌리는 일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워크 워크 밸런스, 일과 작업의 균형이 내게는 중요하다. 그래야만 적당한 자아 실현감과 적당한 경제적 안정감을 고루 느낄 수 있다. 작업이 이상적인 나로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면, 일은 현실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아마도 내가 대단히 재능 있는 작가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작업으로 채우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기에는 역량이 한참 부족한 것이 문제다.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자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을 안 하는 나는 아무리 열심히 작업을 한다고 해도 스스로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감이 끊긴 상태에서 마냥 드로잉이나 하면서 정신 승리를 맛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추슬렀으면 슬슬 일감이 없는 상황도 추슬러야 했다.

일감이 끊긴 이유는 사회의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멍하니 기존 흐름에 계속 머물 것이 아니라, 물이 완전히 말라 버리기 전에 다른 흐름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남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는 나이에, 거꾸로 직장을 구하겠다고 취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경단녀를 위해 마련된 세 달 남짓한 교육에 참여했고, 조금 무리해서 자격증 네 개를 연달아 땄다. 매 순간순간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었지만, 스스로를 정신없는 일과의 한복판에 내던지는 것은 확실히 불안을 달래는 데 효과가 좋았다. 

한편, 무너져 버린 삶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한창 안간힘을 쓰던 시기에 우연히 예술인 심리상담에 관한 안내 글을 보았다. 심리검사를 비롯하여 최대 12회까지 무료 심리상담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무료인 것도 물론 좋았지만, 나로서는 무엇보다 상담 횟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좋았다. 상담이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상담이 끝날 즈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약은 끊기로 굳게 다짐했지만, 상담은 좀 더 받을 수 있다면 받고 싶었다. 그런 도움이라도 없으면, 혼자서는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상담 신청을 하고 내 차례가 올 때까지 한 달쯤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취업 교육을 받는 시점과 상담을 받는 시점이 겹쳤다. 낯선 기술을 배워 새로운 분야로 취업하려니 잔뜩 스트레스를 받던 참이었고, 상담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진로에 맞춰졌다. 상담사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12회 안에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었고, 몇몇 뿌리 깊은 문제는 아예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제를 한두 가지로 좁히고 싶었는데, 시기상 그게 진로가 된 것이다. 

상담 초반에는 ‘어떤 일에 대하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가만히 관찰하고 어떤 감정인지 파악한 다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라는 식의 조언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그런 말이 달갑지 않았다. 나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가 8년 동안 내내 강조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대신 미래를 내다보면서 좀 더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상담사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꺼이 함께 발맞춰 걸어 주었다. 어정쩡하게 끝나 버린 나의 지난 상담에도 함께 마침표를 찍어 주었다.

이제는 ‘마음을 관찰하는 일’에도 얼마든지 협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다 내가 애쓴 덕분이지만, 어느 정도는 예술인 복지재단에서 연결해 준 심리상담사 덕분이기도 하다. 비정한 줄만 알았던 세상에, 뜻밖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잠시 기댈 만한 작은 버팀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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