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 손에 잡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마른 페이지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진 않았지만, 독서인이라면 압니다. 책장을 덮은 바로 지금, 간절하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요.
그러나 이 ‘한 줌’ 독서 시장, 그런 ‘책 친구’ 구하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독서모임을 검색해보면, 어떤 곳은 참가비가 꽤나 있고, 어떤 모임은 ‘연애를 권장’한다는 문구까지 앞세웁니다. 모두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어떤 독서인에게는 ‘진입 장벽’인 셈입니다.
독서인들이 모임을 포기하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일시: 평일 저녁 오후 7시 30분. 장소: 강남역 근방.’ 그 시간, 그 장소에 도착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독서모임이 평일 저녁, 강남역 혹은 그밖의 서울 일대에서 열리더라고요. 제가 했던 독서모임도 그랬죠. 저는 독서모임에서 정말 좋은 경험을 했지만, 뭔가 아쉬웠어요.” “퇴근 후에 강남역에 모일 수 없는 사람도 있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수도권에만 사는 게 아니니까요. 야근하는 사람도, 워킹맘도 있고요. (독서 모임이) 정말 좋은데 그분들은 즐길 방법이 없는 거예요.”
2022년 문을 연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지식공동체 ‘그믐’의 김새섬 대표의 말입니다. ‘온라인’이라는 말처럼, 그믐은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워킹맘도, 지역청년도, 해외 독자도 모입니다. ‘명사’가 아니어도 모임의 호스트가 될 수 있고요. 그렇게 2024년 기준, 1만 4천 명의 회원이 모였습니다.
그믐은 지금, 단순한 플랫폼이라기보다 하나의 섬이자 생태계에 가깝습니다. 독자뿐 아니라 저자, 출판사, 학교와 도서관 등등. 다양한 주체들과 연결되며 그 자체로 작은 독서 생태계를 형성하니까요. 1만 4천 독서인이 찾은 새로운 섬, 그믐의 김새섬 대표를 만났습니다. 책과 연결에 대한 이야기. 나아가 모두가 ‘돈이 되는 것’에 뛰어들 때 ‘잘 될 것 같지 않아도’ 책을 향해 걸어간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잘될 것 같지 않아서 했다”
퇴사 후 ‘돈 안 되는’ 책 사업에 뛰어든 이유
이런 곳을 만든 김새섬 대표는 어떤 사람일까요? 책 관련 사업인 만큼 출판인이나 작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책과 무관한 일을 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15년간 외국계 기업에서 재무 일을 해왔답니다. “이직할 때마다 연봉도 착실히 올려”왔다고요.
하지만 굳건한 15년 차에게도 번아웃은 찾아왔습니다. 김 대표는 이제 ‘돈’이 아닌 다른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보고 싶었다고 해요. 하지만 막상 퇴사하자 찾아온 건 또 다른 종류의 우울감과 무기력.
보다 못한 가족이 그를 제주도로 이끌었습니다. 별다른 계획과 기대도 없이, 발 닿는 대로 그 섬을 여행하는 과정은 말 그대로 ‘새로운 길’을 찾게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하던 ‘책’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살면서 제가 책에게 받은 것들이 정말 많아요. 그걸 돌려주고 싶었어요.”
반대로 말하자면, 책이 무기력한 한 사람을 일으켜준 것이기도 할 겁니다. 그렇게 2022년. 김 대표는 남편인 장강명 작가, 그리고 뜻있는 이들과 모여 ‘그믐’을 열었습니다. 지금처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쾌거도, 텍스트힙의 유행도 없던 시절. 말 그대로 ‘독서계의 아주 깜깜한 어두운 밤’, 그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사라지면 어둠이 찾아온다”
Q. 독서율은 지금도 역대 최저이지만, 2022년은 ‘텍스트힙’의 유행도 없었잖아요. 그믐이 문을 열 때 수익적으로도 걱정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용기를 내셨나요.
독서율은 사실 지난 한 20년 동안 꾸준히 하락했잖아요. 어느 순간에 탁 떨어진 게 아니죠. 저는 책 사업, 그러니까 이 독서 생태계가 전망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게 아니에요. 지금도 잘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잘될 것 같아서 한 게 아니라 너무 안 되기 때문에 했어요. 잘 안되니까, 나라도 해야겠다….
Q. 다들 ‘잘될 것’을 찾아 헤매는 시대에,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요!
제가 처음 책에 관한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질문하던 게 이거였어요. ‘서점 할 거냐’, ‘1인출판사를 할 거냐’라고요. 그런데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제가 책방 하나 더 만든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죠.
제가 생각한 문제는 이거였어요. ‘책이 참 좋은데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어. 어떻게 하면 독서 인구를 늘릴 수 있지?’. 이거요. 출판사를 만드는 것도 의미 있겠죠. 그런데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출판사 수는 이미 최고로 많잖아요. 줄어들고 있는 건 독자의 숫자죠. 독자를 늘리고 싶었어요.
“독서 모임”이 그 대안이었습니다. “코로나 시절에 중단돼 아쉬웠던 독서모임이 생각났어요.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사람들이 책을 아무리 안 읽어도, 옆에서 자꾸 재미있다고 하면 읽거든요. 옆구리를 쿡쿡 찔러주는 거죠. ‘아, 이거 진짜 재미있다’ 이렇게요.”
“길 가다가 보면 요즘 ‘러닝 크루’들 보이잖아요. 처음에 보고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 떼로 달리는 거야?’ 솔직히 자기 다리로 그냥 혼자 달리는 건데, 뭐 하러 달리기를 떼로 하나…. (좌중 웃음) 그런데 같이 달리면 끝까지 달릴 수 있다는 거예요. 이해가 되더라고요. 책도 같이 읽으면 끝까지 읽는 힘이 생겨요.”
요즘 고등학생, 책 ‘못’ 읽는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것 같지만, 당연히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확신이 생긴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믐’이 정식 문을 열기 전, 보성고등학교 학생들과 베타테스트로 '작가와의 만남' 독서 모임을 가졌을 때. “학생들이니까 서로 장난치거나 욕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어른의 섣부른 생각이더라고요. ‘그믐’의 취지를 알려주니, 학생들은 어른보다 더 정중했어요.”
학생들은 치열하게 책을 읽고 생각을 개진했습니다. “학원 끝나는 11시~12시, 그 밤에 학생들이 몰려와서 자기 생각을 적어요. 피곤한 와중에도요. 그때 분명 뭔가를 느꼈어요.” 인터뷰 내내 논리정연하게 이어지던 김 대표의 말끝이 처음으로 떨린 순간이었습니다.
‘책을 깊이 있게 읽는 시간이었다’. 만족도 테스트에서는 90% 넘는 학생들이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이렇게 말했어요. ‘보통 (혼자) 책을 읽으면 뒤로 갈수록 (안 읽고) 흐지부지되는데, 계속 끌어가는 힘이 생겼다’라고.”함께 읽은 책은 장강명 작가의 ‘산 자들’.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담은 단편 소설집입니다. “18살 학생들이었거든요. 사회에 나가면 겪게 될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더 와닿지 않았을까요.” 판만 잘 깔아주면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던 겁니다. 그것도 열렬하게.
‘좋아요’는 없고, ‘29일’이면 폭파하는 세계관
그렇게 완성된 ‘그믐’은 ‘독서 판’을 제대로 깔아줍니다. 관심 경제의 시대, ‘좋아요’ 버튼은 없습니다. “저번에는 ‘좋아요’가 70개였는데 오늘은 왜 30개인지” 쓸데없는 걱정을 안 하도록. 버튼만 누르지 않고 “자기 생각”을 적을 수도 있고요. 게다가 모임은 ‘29일’이면 폭파됩니다. “책 읽을 때 데드라인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29일이면 책 한 권은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책을 매개로 한 더 좋은 ‘지식 공동체’를 위한 고민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이든 ‘인싸’(insider)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잖아요. 사람들은 그들을 선망하게 되고, 그러면 새로 유입된 이들은 겉돌고 소외될 수 있어요. 그건 건강한 공동체가 아니에요. 하나의 모임이 재미있어도, 끝이 나면 새로운 사람들이 올 텐데, 그 사람들을 받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29일 룰을 만든 거예요.” 인간이 모이면 생겨나는 ‘정치질’과 ‘친목질의 적폐’를 최대한 막겠다는 뜻.
지난해 그믐은 1만 4천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누군가는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숫자이지만, 그 가치를 숫자로 말하긴 아쉽습니다. 운영진도 예상하지 않았지만, “얼굴 없는 독자”를 찾아 다양한 주체들이 모이는 작은 ‘독서 생태계’가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북토크 한번 해서 20명 모으기 쉽지 않은” 요즘, 1인 출판사와 저자들이 이곳을 찾아옵니다. 인스타그램 마케팅이 주도하는 출판계에서, SNS 사용이 어려운 중노년층 1인출판인도 ‘그믐’을 선호한다고요.
무엇보다 독자가 남다릅니다. “지금 그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임이 뭔지 아세요? ‘벽돌책’ 읽기 모임이에요.” 진지한 책 이야기를 원하는 외로운 독자들이 비슷한 이를 찾다 그믐에 정착합니다. ‘벽돌책 읽기 모임’ 호스트인 강양구 과학전문 기자가 대표적입니다. 운영진이 섭외한 게 아니였다고요. 일례로,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을 주제로 한 모임에는 2천 개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무려 1040쪽의 책인데도!
가족과 국가 사이, ‘작은 공동체’ 그리고 ‘책’의 힘
Q. 그믐이 일상에서 만나기 힘든 ‘취향과 지식의 공동체’가 되어준 셈이에요. 그런데, 기고하신 칼럼에 해외에는 '독서모임'이 원래 많았다는 내용이 신기했어요. 관련해 얘기를 더 해주시겠어요?
영화로도 나온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또 오프라 윈프리나 리즈 위더스푼의 북클럽 등 셀럽이 운영하는 모임도 그렇고. 해외에는 이런 작은 공동체가 자연스럽죠. 꼭 책 얘기만 아니고요. ‘알코올중독자 자조모임’ 같은 것들도요.
Q. 미국드라마에 동그랗게 둘러 앉아 이야기 나누는...
네, 바로 그거요. (웃는다) 한국은 학교 동아리 정도가 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던 건 산악회 정도가 있겠네요. 아니면 연예인 팬클럽이 있는데 결이 다르죠. 제 생각에, 한국은 중간 사이즈의 공동체가 부재한 것 같거든요.
무슨 말이냐면 한국은 가족이란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가 있다면, 그 다음이 바로 ‘국가’예요. 가족은 2~4명인데, 국가는 5천만 명이죠. 이 사이가 대체로 비어 있는 셈이에요. 그 사이에 20~100명 정도까지의 조금 작은 공동체 문화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모여서 맛있는 것도 먹고 책도 읽고 취미도 나누고. 그래도 지금은 그런 문화가 생겨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AI 시대, 당신이 책 읽어야 하는 이유 (최종)
Q. AI와 동영상으로 누워서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시대잖아요. 책은 왜 읽어야 할까요?
요즘 지식을 제일 많이 아는 건 AI예요. 걔한테 물어보면 다 알죠. 우리는 AI랑 게임이 안 돼요. 대신 ‘지식 습득’ 말고, ‘맥락’ 읽기가 중요해요. 지식과 지혜는 다르죠. 맥락을 읽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지혜는 책으로 기를 수 있어요. 그건 AI나 동영상이 주는 대로 떠먹여 줄 때 얻는 게 아니거든요. 물론 책 읽는 게 더 힘들 거예요. 지루할 거고요. 그런데 그런 버티는 힘도 책이 만들어주죠. 그리고, 책으로 생각하는 것만 아니라 언어 활용법도 배울 수 있거든요.
예컨대 ‘계엄’이라는 단어를 모를 때, 맥락으로 계속 유추하고, (단어가 나오는 문장을) 많이 읽다보면서 뜻을 알게 돼요. 저는 외국어도 책으로 배웠죠. 문제집을 많이 풀었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Q. 연애와 외국어는 현장에서 부딪쳐서 얻는 게 아닌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호주에서 유학 갔을 때였어요. 중고 서점에 가면 얇은 책 한 권에 1달러 정도였죠. 당시 한국 돈으로 천원이 안됐는데, 영어 소설책을 엄청 사서 읽었어요. 근데 좀 재미있어야 해요. 누가 죽고 사건이 막 일어나는…(좌중 웃음) 자극적이니까 자꾸 페이지가 넘어가거든요. 궁금하니까 단어도 찾게 되고. 계속 그렇게 수십 권 (소설을) 읽으니까 영어로 된 서류들을 그냥 잘 읽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말과 글은 사실 그렇게 배우는 게 맞는 것 같아요.
Q. ‘책에서 많은 걸 받았다’는 것에 ‘외국어 실력’도 있던 셈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대표님께 ‘책’은 어떤 의미였나요?
어렸을 때 넉넉하지 못한 환경이었어요. ‘이놈의 집구석’하면서 책을 읽었죠. (웃음) 소공녀 같은 동화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현실 도피였지만 나중에는 더 많은 걸 얻었죠. CD, 비디오 같은 비용이 나가는 취미들도 있지만, 책은 도서관만 가면 ‘빵 원’에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게 했고요. 특히 소설 같은 경우는 더더욱. 어떻게 우리가 18세기 흑인이 되어보고, 뉴욕을 경험하고, 타인이 되어보겠어요. 그러면서 생각하는 법, 공감하는 법도 배우고. 그러니까 제 인생에서 책은 너무 많은 것들을 제게 주었어요. 아주 좋은 것들을. ‘선물’처럼 많은 걸 줬는데, 그럼 전 뭘 돌려줄 수 있을까요?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김 대표는 그믐을 만들었습니다. 한 칼럼에 따르면, 김 대표는 그믐을 처음 기획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 세 사람이라도 (책으로) 구원할 수 있다면’ 그믐을 만들겠노라고. 그리고 지금, 그믐에는 1만 4천 독서인이 모여있습니다. 오는 4월 23일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솔깃한다면 책, 혹은 그믐을 ‘눈팅’이라도 해보면 어떨까요. 김 대표가 말하는 책의 ‘선물’을 당신도 받게 될지 모르니까요.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
Copyright ⓒ 독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