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고해진 인턴기자】 부슬비가 내리는 19일 오전 8시. 궂은 날씨에도 토요일 여의도 한강공원 물빛무대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번호표를 붙인 옷 위에 우비를 입는 사람, 준비운동을 하는 사람, 가볍게 뛰며 몸을 푸는 사람까지. 각자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들을 이곳으로 모은 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달리는 마라톤, ‘키움런’이었다.
“요즘 야외 러닝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장애인분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가 있었으면 했다.” 행사장 부스에서 만난 홍윤희(50) ‘무의’ 이사장은 키움런의 기획 배경을 이같이 설명했다. 키움런은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맞아 열린 배리어프리 지향 기부 러닝 페스티벌이다. 사단법인 무의가 주최하고, 키움증권이 후원했다.
행사장 곳곳에서는 배리어프리 환경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눈에 보였다. 한쪽에는 소음과 인파에 예민한 참가자를 위해 심신안정실이 마련됐다. 통증케어부스에서는 장애인 러너의 통증에 대응하는 전문 인력이 상주했다. 응급상황을 대비해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서대문 희망차’도 대기 중이었다.
각 부스 앞에는 노란 형광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서 있었다. 특수교사로 일하고 있는 양명윤(54) 자원봉사자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다 함께 하는 대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며 현장 운영에 관한 궁금증으로 참가했다고 말했다. 스포츠 마케팅 분야를 진로로 생각 중인 김서윤(19) 자원봉사자는 “사전 교육 덕분에 평소 잘 모르던 장애인분들을 대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고 덧붙였다.
‘함께러너’라는 글씨가 적힌 보라색 스티커를 등에 붙인 참가자도 눈에 띄었다. 대회 도중, 이동에 어려움이 생긴 참가자가 도움을 요청할 때 함께 달리겠다는 의미다. 30대 이계선 참가자는 “러닝을 경쟁처럼 여겨 혼자 잘 뛰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즐겁게 달리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았다”고 스티커를 붙인 이유를 설명했다.
“천천히 몸통 돌리시는데, 앉아서 하는 분들은 옆을 잡고 하시면 안전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 둘, 셋, 넷….” 출발 10분 전, 참가자들은 광장에서 몸을 풀며 대회의 시작을 준비했다. 광장 대형 화면에는 수어 통역사가 실시간으로 안내 동작을 전달했다. 강사는 동작을 선보이면서도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대회가 시작되자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아스팔트 길에서 다양한 참가자를 만날 수 있었다. 가이드러너와 달리는 시각장애인 참가자, 아이가 탄 유모차를 밀며 나아가는 참가자, 자녀와 부모가 함께 뛰는 가족 단위의 참가자도 있었다.
코스를 따라 달리던 중 만난 성효정(45) 참가자는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들과 완주를 목표로 나왔다. 그는 “다양한 러너들이 있으니 중간에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민폐로 여겨지기보다 이해가 되는 느낌”이라며 특히 “기록이 우선이 아닌 분위기라 마음이 편했다”고 말했다.
코스 중반을 넘기자, 참가자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안 남았다!”, “파이팅!” 서로의 등을 다독이는 말들이 이어졌다. 각자의 속도와 달리기 방식을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완주한 후, 참가자들은 받은 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부스 이벤트에 참여하며 행사를 즐기기도 했다. 행사장 분위기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에도 이어졌다.
처음 마라톤에 도전한 모주영(42) 참가자는 휠체어를 타고 5km를 완주했다. “마라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영역이었는데 참여할 기회가 있다는 그 자체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휠체어를 타고 도착 지점을 통과한 이승일(52) 참가자는 “이만큼 배리어프리한 마라톤은 없을 것 같다”며 “배리어프리 문화가 다른 마라톤 대회로도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만족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길의 폭이 좁았던 점은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백정연(45) 참가자는 “시각장애 참가자도 있고, 휠체어 사용자도 있고, 유모차도 많아서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다른 대회보다 훨씬 컸다”며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 조심하고, 응원하는 문화가 좋았다”고 말했다.
한국 시각장애인 마라톤회 ‘VMK(브이엠케이)’ 회원으로 호흡을 맞춰 온 두 사람도 만났다. 가이드러너와 시각장애러너는 ‘트러스트 스트링(믿음의 끈)’으로 연결된다. 가이드러너가 끈을 당기거나 풀면서 시각장애러너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시각장애러너인 최경록(44) 참가자는 “같이 뛰는 주자들이 서로 달리기 편하도록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말했다. 가이드러너인 남유원(36) 참가자는 “앞에서 뛰는 그룹으로 배정받은 덕분에 사람들을 제치고 가는 일이 많지 않아 달리는 길이 편했다”며 “길가에 라일락이 활짝 펴있는 코스가 있었는데, 뛰면서 맡은 꽃향기까지도 기억에 남을 좋은 경험이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함께 달린다’는 말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누군가는 첫 도전을 응원받았고, 누군가는 익숙한 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배웠다.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완주의 기쁨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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