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양우혁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관세 전쟁의 불씨가 전 세계로 번지는 가운데, 유럽연합(EU)과 중국이 전기차 고율 관세 철폐를 포함한 통상 협력을 타진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또 다른 변수가 등장했다. 유럽 친환경차 시장을 차세대 성장축으로 삼아온 현대차·기아로서는 이로 인한 경쟁 심화와 가격 압박이라는 복병을 마주하게 됐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EU는 지난해 10월부터 중국산 전기차에 부과해 온 고율 상계관세를 폐지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당시 EU는 중국 정부가 비야디(BYD), 지리자동차, 상하이자동차(SAIC) 등 자국 전기차 업체에 불공정 보조금을 제공했다고 판단해 추가 관세 조치를 단행했다. EU는 수입 자동차에 기본적으로 1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여기에 브랜드별로 7.8~35.3%포인트의 상계관세가 추가 적용됐다. 결과적으로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총 관세율은 최소 17.8%, 많게는 45.3%까지 올라갔다.
구체적으로는 비야디가 17%, 지리자동차가 18.8%, 상하이자동차가 35.3%의 상계관세를 각각 적용받고 있다. 이 같은 조치는 유럽 완성차 업계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유럽이 독자적인 통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대해 최대 145%에 이르는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해 중국도 미국산 제품에 최고 84%의 보복관세를 매기고 있다. 미국은 이와 함께 EU에도 철강·알루미늄에 25%, 자동차에 25%, 상호관세에 20%의 고율 관세를 예고했다. EU는 일부 미국산 소비재에 대해 25% 보복관세로 응수했지만, 최근 미국이 중국 외 국가들에 대해 상호관세 적용을 90일 유예하고 기본 10% 관세만 부과하기로 하면서 EU 역시 보복 조치를 유예하고 협상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기조 속에서 EU와 중국은 오는 7월 정상회담을 개최해 무역 마찰 해소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EU 고위 인사들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기 위해 7월 말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양측은 고율 상계관세를 철회하는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의 최저 가격을 설정하는 ‘가격 기준제’ 도입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에선 이를 두고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에 대응해 유럽과 중국이 전략적 공조에 나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EU는 이번 조치가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에 따른 직접적인 대응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만 유럽 주요 완성차 기업들이 중국에 대규모 생산 거점을 두고 현지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양측이 갈등을 조기에 봉합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폭스바겐 등 주요 유럽 브랜드는 중국을 단순한 수출 대상이 아닌 핵심 생산·판매 기지로 삼고 있어 무역 장벽이 장기화될 경우 공급망 안정성과 수익성 모두에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유럽 전기차 시장의 판도가 요동치는 가운데, 현대차·기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유럽을 전략시장으로 삼고 친환경차 라인업을 확대해왔지만, 중국 업체들이 관세 장벽 완화를 계기로 유럽 시장에 본격 재진입할 경우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불리한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부터 유럽 시장에서 내연기관 중심의 기존 판매 전략을 친환경차 중심으로 전환해 왔다. 그 결과, 작년 유럽 내 판매량은 전년 대비 3.9% 감소한 106만3517대로 집계됐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해당 관세가 폐지되면 중국 전기차는 유럽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빠르게 점유율을 늘릴 것”이라며 “현대차·기아 입장에선 유럽 내 입지를 지키는 데에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핵심 광물 수출을 제한하며 첨단산업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드러낸 만큼, EU도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고율 관세를 일부 완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유럽 내 중국 전기차의 입지가 더 커질 수 있어, 국내 자동차·배터리 업계는 차세대 기술 확보와 소재 경쟁력 강화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중국이 희토류와 배터리 원소재를 사실상 선점한 상황에서 리튬이온 배터리 분야는 더 이상 경쟁이 쉽지 않다”며 “EU가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고율 관세를 철회할 경우, 가격 경쟁력 격차는 한층 더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결국 전고체 배터리와 같은 차세대 기술로의 전환과 함께, 초기 단계부터 수직 계열화를 추진하는 것이 중국과의 가격 격차를 줄이고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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