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이층농 위에 올려진,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든 모자 ‘갈모’.
1978년 정부조사 필증 흔적이 스티커로 남아 있는 조선 주병.
오랜 시간 절에서 시간을 보낸 용두와 진주 반닫이.
필연, 특별한 행운을 만난다
어느 날 황학동 풍물시장 노점에서 80대 어르신이 삼국시대 토기와 백자 몇 점을 팔고 계셨다. 그중 작은 백자 주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구연부에 수리한 흔적이 있긴 하나 1978년 정부기관의 조사 필증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조시대의 백자였다. 이렇게 귀한 만남이야말로 골동품 탐방의 진정한 묘미다. 골동품 수집을 시작한 지 어느덧 7년, 그사이 우리 부부의 취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단지 오래되고 경제가치가 있는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미감이 선명하면서도 우리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는 것들. 무엇보다 만든 이의 솜씨가 느껴지는 디자인과 물건에 담긴 이야기가 중요했다. 금이 가고 흠집이 남은 목가구나 사용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민속 공예품, 심지어 연필로 낙서된 조선시대 민화마저 매력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에게는 낡고 보잘것없는 물건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품은 유물들이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신혼 때부터 아내와 함께 4년 넘게 눈여겨본 조선시대의 찬장이었다. 2m가 넘는 크기와 높은 가격 때문에 망설였지만 결국 찬장은 아내의 작업실에 자리 잡게 됐고, 그곳에 있던 르 코르뷔지에의 LC2 소파와 나란히 놓인 모습은 그야말로 특별했다. 현대건축의 거장과 조선시대 장인의 작품은 그 자체로 훌륭한 조화를 이뤘다. 김환기 화백은 막역한 예술 동지였던 김중업 건축가에게 1953년 이런 편지를 썼다. “중업 형! 기왕에도 형과 늘 얘기했지만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나 정원에 우리 이조 자기를 놓고 보면 얼마나 어울리겠소. 르 코르뷔지에의 예술이 새롭듯이 이조 자기 역시 아직도 새롭거든. 우리 고전에 속하는 공예가 아직도 현대미술의 전위에 설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크나큰 사실입니다. 어디 이조 공예에만 끌리겠소. 형도 말했지만 까마득한 고구려의 벽실, 이것 역시 대단한 문제거든. 우리는 이런 것들을 들고 나서야 할 것 같소.” 김환기 화백의 편지가 큰 영감이 되어 우리는 골동품이 현대인의 공간에서 가치 있는 조화를 이루고 일상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공간 ‘고복희’를 열었다. 전통과 현대의 결합은 잊혀가는 고미술과 고가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특히 젊은 세대가 골동품의 매력을 발견하고 오래된 것에서 가장 신선한 시각과 새로운 영감을 얻기를 바란다. 조선시대 장인이 의뢰인의 취향에 맞춰 제작한 가구들은 같은 디자인을 찾기 어려울 만큼 독창적이다. 지역마다 장식과 구조의 차이가 뚜렷해 각 지역의 문화와 미감이 고스란히 담긴다. 골동이란 수백 년을 견뎌온 특별한 존재이자 세상에 하나뿐인 시간의 조각이다.
김성호(UI·UX 디자이너)
」아내와 결혼 후 본격적으로 빈티지 가구와 골동품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신혼시절부터 지금까지 100여 곳의 박물관과 골동품 상점을 함께 누볐다. 김성호의 인스타그램(@maumc)에는 ‘#서울수집품’이라는 해시태그 아래 옛것에 대한 애정 어린 기록들이 가득하다.
조선 말기 민화 〈화조도〉와 19세기 경기도 광주 분원 제기.
계룡산 회청사기 사발.
유리 캐비닛 안에 든 19세기 경기도 광주 분원 탕기와 제기.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제사에 쓰는 떡을 담아 올리는 그릇인 편대와 그 위의 약수저들, 15세기 조선 초기 연질 백자 접시, 조선 초기 경상남도 백자 접시, 큰 편대 위에 올려진 19세기 경기도 광주 분원의 청화 백자.
골동이라는 세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
“상상력은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했던 어느 유명 화가의 말이 떠오른다. 골동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하나의 골동품에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골동품이 겪어온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어떤 판타지보다 환상적이다. 나의 첫 골동품은 중고나라에서 구매한 조선백자와 고려청자 그릇이었다. 지금이야 연대와 지역적 특징을 구분하고 진품과 가품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졌지만, 그때는 그저 호탕한 중년 신사와 무지한 청년의 거래였다. 조선백자를 손에 쥐었다는 사실만으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골동품 수집은 나를 이 세계의 유영자로 만들었다. 내 수집품 중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은 건 조선 초기의 계룡산 분청사기 귀얄문 사발이다. 찌그러지고 부서진 이 사발을 보면 이를 빚은 도공의 손길과 사발을 거쳐간 수많은 손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찌글이 다완’이라고도 불리는데, 가마 속에서 화마를 견디지 못해 일그러진 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본래 이런 기물은 사용가치를 잃고 버려지기 마련이지만, 이 사발은 기특하게도 살아남았다. 어떻게 발견됐는지, 언제 깨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리된 방식과 말차를 격불한 흔적, 깊게 밴 찻물 자국을 보면 어느 일본인 다인에게 사랑받은 기물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골동품은 완전무결함이 아닌, 불완전함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다채로운 이야기로 빛을 발한다. 오래된 물건의 매력을 애호하는 문화는 각자가 지닌 현대적 감각을 더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전통의 우월성을 찾기보다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유물을 미술사적 맥락에 한정하지 않고 동시대 공간 속의 오브제로 본다. 유물이 지닌 아름다움을 어떻게 현대적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찬탁이나 서탁 같은 선반 가구들은 대체로 단순미가 뚜렷해 유럽의 모듈형 가구처럼 현대적 공간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겉으로 도드라지는 특징이 없는 소반이나 서안, 책장 같은 가구들은 그 겸손함 덕에 어느 공간에서든 빛을 발하고, 어떤 물건과도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골동품을 수집하는 과정은 단지 물건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안목을 키우고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정이다. 쓸 줄 아는 언어가 많아질수록 볼 줄 아는 세상이 넓어진다. 나에게 골동품은 또 하나의 언어다.
김민호(레반다빌라 공동 대표)
」스칸디나비아 빈티지 가구부터 아프리카 앤티크 소품까지 삶의 감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기물들을 모으고 선보이는 공간 ‘레반다빌라’를 운영 중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지닌 이야기와 아름다움에 한없이 매혹돼 온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탐닉을 이어가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 가야 토기들.
담뱃잎을 담아두는 돌 소재의 합으로 기쁠 ‘희(熹)’가 두 개 붙은 쌍희 문양의 석합, 잘린 고려 숟가락, 조선시대 대모 빗과 머리 장식.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에 묻으려고 실물보다 작게 만든 명기와 고려시대 숫가락, 조선시대 청화 연적.
다른 백자와 달리 왕실에서만 사용한 조선시대 청화 백자 항아리.
오래된 물건들은 잔잔한 물결처럼
골동품은 내게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조용히 가라앉고, 어설픈 욕심에서 벗어나 겸손을 일깨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 얕은 지식으로도 그 기물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뎌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건이 품은 수많은 사연이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릴 적 우리 문화와 옛 물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녔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골동품과 늘 가까이 지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들려주던 오래된 물건의 이야기를 좀 더 귀 기울여 들었다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아버지에게 배운 고대 유물에 대한 감각과 통찰은 박물관이나 책에서 얻을 수 없는 생생한 가르침이었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이가 빠진 사발을 왜 수집하느냐고 여쭤본 적 있다. 아버지는 “그 사발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다 생긴 상처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특별한 인연으로 우리에게 왔으니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 말처럼 내 사무실과 집은 예사롭지 않은 인연으로 맺은 골동품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수많은 옛 물건 중 특히 어떤 것을 담아내는 쓰임을 지닌 기물에 마음이 간다. 처음에는 크고 웅장한 목기류에 매료됐지만 이제는 작고 섬세한 사물로 관심을 옮겼고, 지금은 사발과 항아리가 많다. 수많은 기물과 함께 사는 삶은 만만치 않다. 유물을 가져와 옮기고, 다른 유물로 바꿔보기도 하며, 닦고 수리하고 고서화의 프레임을 교체하는 데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쓴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유물들이 내 생활 속에서 새로운 맥락과 용도를 찾아가는 순간은 늘 즐겁고 흥미롭다. 내 사무실에서는 어느 조선백자 붓 통이 사무실 책상 위의 필통으로, 고려청자 종지는 클립 통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군가는 현대적 리빙 스타일에 우리 옛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조화가 오히려 세련된 것 같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산란할 때면 도자기든 목기든 손에 닿는 대로 꺼내 조심스럽게 살살 닦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특히 은상감 담배합을 만질 때면 차분한 무게감이 손끝으로 전해지며 마음을 더욱 깊이 가라앉힌다. 그러면 이윽고 ‘침묵의 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다.
손란(손스마켓메이커즈 & 무명씨 대표)
」미국 농산물 관련 협회의 국내 홍보 활동을 전담하는 ‘손스마켓메이커즈’와 고미술 갤러리 ‘무명씨’를 운영하는 손란 대표. 그녀의 집과 사무실에는 아버지 때부터 수집해 온 진귀한 고미술품과 골동품으로 가득하다.
Copyright ⓒ 엘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