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993년 사이에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당시 기자는 외교부를 출입했는데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갑자기 한미통상문제가 지금처럼 핫이슈에 떠올랐음이 기억에 남아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북미자유무역협정(NAGTA)과 WTO를 출범시키는 등 자유무역의 선봉장 역할을 자임했지만 무역상대국에게 보복을 가하는 슈퍼301조를 적극 활용하는 등 보호무역주의 정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클린턴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서울에서 열린 한미통상협상에서는 미국 대표단이 한국 시장 개방을 강력 요구하면서 국내 산업계는 큰 긴장감에 빠져들었다. 당시 클린턴 정부는 자유무역의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시장개방을 적극 주장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대목은 바로 미국 협상단 대표가 내뱉은 푸념들이었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협상을 진행하던 미국측 대표단은 이렇게 말하면서 화를 냈다.
“저기 밑에 얼마나 많은 자동차들이 다니느냐. 그런데 전부 한국 차들이다. 미국 차는 정말 우리 관용차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럴수가 있느냐. 이러고도 한국이 공정무역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당시 기자는 이와 같은 협상 뒷얘기를 직접 기사화했기 때문에 아직도 그 대목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무려 30여년이 지난 2025년 공화당의 트럼프 대통령이 그때와 똑같은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보니 놀랍기보다는 감회가 새롭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현지시간)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대한 관세 조치를 발표하면서 “한국, 일본과 다른 많은 국가가 거대한 무역 장벽의 결과로 부과하는 비금전적 제한이 최악이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의 81%는 한국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0여년간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 정부가 몇차례 바뀌면서 무역정책도 극과 극을 오고갔지만 버텨왔고 이제는 미국 시장에서 거의 국민차 수준으로 성장했다. 때문에 작금의 트럼프발 무역전쟁이 아무리 거세게 전개된다고 해도 분명 그 파고를 넘어설 능력을 갖춘 것으로 믿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미국 당국자들은 물론 대통령까지 나서 “왜 한국거리에 미국 차가 보이지 않느냐”고 아우성이지만 한미FTA로 무관세 혜택을 받는 미국차가 한국시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비관세 무역장벽보다는 그네들의 경쟁력 저하때문임은 분명하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관세전쟁 돌파카드, 기술 경쟁력에 주목해야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관세전쟁이 요란하지만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2025년 3월 미국 시장에서 각각 9만 4129대, 7만 8540대를 판매했다. 이는 역대 3월 기준 최고 기록이며 전년 동기대비 13% 가량 늘어난 수치이다.
단순한 수치에만 주목하지 말고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종의 실적을 견인하고 있음에 관심을 주어야 한다. 현대차는 전년 동기 대비 전기차 판매가 3%, 하이브리드는 무려 68% 늘었다.
이같은 수치는 미국 시장이 전체적으로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종으로 수요가 옮겨가고 있음과 무관치 않다.
올해 3월 미국 자동차 판매량은 159만4000대로 10.5% 증가했다. 연료별 차종을 보면 순수전기자동차(BEV)는 11만5000대로 전년 대비 19.2%, 하이브리드는 19만3000대로 56.1% 늘었고 플러그인하이브리드도 3만8000대(15.6%)로 두 자리 수 성장률을 보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실적은 이같은 미국 소비자의 변화에 부응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트럼프 정부의 관세폭격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실적이기 때문에 장래가 불투명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현대기아차를 선호하는 미국 소비자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유의미한 실적이 아닐 수 없다.
현대자동차그룹이 관세전쟁에서 이겨내는 길이 있다면 한미간에 여러 소통을 통한 관세압력 완화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기술력의 뒷받침을 받는 가성비의 장점을 살리는 길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에 소품으로 등장하는 현대기아차의 이미지가 오랜 기간 싸구려 이미지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차는 미국 영화에서 고급 이미지를 높여왔다. 가령 '앤트맨과 와스프'에서는 코나, 싼타페, 벨로스터 등이 예쁘고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로 등장하고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도 현대차의 아이오닉5 등장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에서는 현대차 제네시스가 등장하는데 기차와도 혈투(?)를 벌인다.
뿐만 아니다. 현대자동차그룹 자회사인 미국 로봇공학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의 4족 보행 로봇 개 '스팟'(SPOT)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경호에 투입된 것도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자동차 자체는 아니지만 현대차의 미래지향적 이미지에 도움이 될 수 있어 주목이 되는 것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대규모 기술투자와 함께 인도 등 시장다변화에 더 노력해야
김성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현대차 목표주가와 관련해 “내연기관차 대비 평균판매단가(ASP)가 높은 친환경차(xEV) 비중 확대로 매출 증가세가 지속될 전망이고 고환율 흐름 또한 매출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면서 31만원을 목표주가로 유지했다.
유지웅 다올투자증권 연구원 역시 “원·엔 환율 반등 등의 여건이 주가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라면서 목표주가를 32만원을 유지했다.
유 연구원은 1분기 평균 원·달러 환율이 전분기보다 51원 상승하면서 약 2500억 원의 매출 확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물론 최근에는 달러대비 원화가치가 다시 올라가는 형국이지만 우리의 경쟁국인 엔화와 유로화가 원화대비 훨씬 강세를 보이고 있어 환율 도움은 당분간 지속될 수도 있다.
국내 언론에서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미국에 210억달러(약 31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한 뉴스를 크게 다루었지만 지난 1월 발표된 역대 최대 규모 국내 투자에도 주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1월 24조3000억원을 국내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지난해 투자액인 20조4000억원에서 무려 19% 늘어난 규모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올해 국내에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는 것은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투자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연초 발표한 신년사에서 올해 상황을 '퍼펙트 스톰'으로 진단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기본기 강화와 혁신을 통해 예상치 못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업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이 전기차 배터리의 기술 향상을 위한 전담 조직을 출범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연구개발(R&D)투자 11조5천억원 △경상투자 12조원 △전략투자 8천억원을 각각 집행할 계획인데 특히 연구개발 투자는 제품 경쟁력 향상, 전동화, SDV, 수소 제품 및 원천기술 개발 등 핵심 미래 역량 확보를 위해 사용된다.
시장 다변화를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13일 인도자동차공업협회(SIAM)에 따르면 현대기아차는 올 1분기 인도에서 총 22만9126대를 판매했는데 지난해보다 1.5% 늘어난 수치이고 사상최고치를 계속 갱신중이다.
14억 인구의 인도는 자동차 보급률은 아직 8.5%에 불과해 성장 잠재력은 그 어느 시장보다도 높다.
또 현대차 인도법인(HMIL)은 지난해 10월 인도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상장 기념식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인도는 곧 미래”라며 투자 확대와 연구·개발 강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중국시장을 다시 개척하는 방안도 중요하다.
현대자동차와 중국의 베이징자동차(BAIC)가 합작해 만든 베이징현대는 올해 현지 전략형 순수전기차를 출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말 상하이에 '포워드 테크놀로지 연구개발(R&D) 센터'를 출범했다.
현대차그룹은 2023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포함한 러시아 지분 100%를 1만루블(당시 14만원 상당)에 매각하면서 2년 내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옵션을 넣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 시장에 다시 재진출하는 방안도 타진중이다.
트럼프발 관세전쟁은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할 전쟁이다. 하지만 미국 시장 4위로 올라갈 만큼 위상이 올라간 현대자동차그룹이 시장다변화든 기술혁신이든 얼마든지 위기를 극복할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것도 의미가 있음이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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