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치료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①에 이어
[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언젠가 상담이 끝날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얼굴을 붉힌 채로 갑자기 끝나 버릴 줄은 몰랐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이었다. 장장 8년이나 거의 매주 만나서 별의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나눴는데 갑자기 끝이라니, 허망했다. 이제 더는 의사를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내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잘 세팅된 가상 환경 속에나 존재하는 가상 인물 같은 것이었다. 가상 현실이 끝나고, 나는 진짜 현실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사람은 사라져도 말은 남았다. 의사가 내게 했던 조언들이 기억 속에서 자꾸 되살아났다. 나는 그 파편을 더듬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의사와의 헤어짐을 전환점으로 삼아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되고 싶었고,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상가에 작업실을 꾸렸다. 취업 전선에도 뛰어들었다. 무모할 만큼 내달렸다. 그 모든 선택의 밑바탕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그래, 불안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불안이 밀물처럼 거세게 밀려 들어왔다.
의사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내게 일종의 재난이었다. 하루아침에 의지할 곳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진정한 재난은 따로 있었다. 갑자기 약을 끊은 것이다. 복용하는 약을 한껏 줄인 시점에서 치료를 중단했는데도 여전히 내 삶에는 약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약 하나 끊었다고 이렇게 불안할 리 없어.’
‘이건 다 그냥 내가 예민해서 그런 거야.’
처음에는 불안을 기분 탓으로 돌렸다. 이른바 ‘불안한 기분’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 불안쯤은 누구나 안고 살 터였다. 하지만 나는 손톱 밑의 가시처럼 욱신거리는 불안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불안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수치로 나타낼 수도 없고 증명해 보일 수도 없지만 나는 분명히 느꼈다. 내 안에는 약의 통제를 벗어난 불안이 시커멓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불안은 곧 공포로 이어졌다. 잔뜩 팽팽해진 신경이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것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온몸의 땀구멍에서 따끔따끔하게 식은땀이 솟았다. 눈을 뜨고 있는 내내 초조하고 두려워서 안절부절못했다. 하필이면 마침 일감이 끊긴 시기였다. 뭐라도 찾아서 해야 이 불안과 공포가 가실 것 같아서 끊임없이 일을 벌였다. 자꾸 약속을 하고, 자꾸 파투를 냈다.
그래도 다시 약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약을 처방받기 위해 나를 담당했던 그 의사를 다시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겨우 현실로 돌아와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참이었고, 그와의 마지막이 좋지 않았기에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의사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 8년간의 치료를 설명하고 또 다른 치료를 시작할 자신이 없었다. 당분간은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번째 이유는 훨씬 현실적인 것이었다. 정신과를 다니느라 들지 못했던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싶었다. 암 보험은 일반 보험보다 비싼 유병자 플랜으로 겨우 가입했으나, 실손보험은 끝내 가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몸이 크게 아프거나 다칠까 봐 늘 마음을 졸였었다. 지금까지는 정신과 외에는 딱히 병원에 갈 일이 없었지만, 이참에 치료를 완전히 끊고 실손보험에 가입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5년간 병원에 다니면 안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래 정신과를, 정신과 약을 멀리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던데, 그 말은 실제로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는 무신경하고 폭력적인 발언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뾰족하게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니까.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마음을 다잡는 일이라고 믿는다. 상황은 어쩔 수 없더라도 마음은 뜻대로 할 수 있겠지. 다행히 지금은 예전처럼 내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약 없이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작업을 하며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애썼다. 작업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지만 기운을 내어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 하루에 한 장씩 드로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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