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드라마의 중심축은 ‘착한 주인공’이었다. 정의롭고 성실하며, 악에 맞서 싸울 줄 알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인물. 그러나 요즘은 좀 다르다. 선량한 주인공이 참는 사이, 시청자는 답답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서사에서 가장 뜨거운 존재는 ‘악인’이다.
피카레스크(Picaresque). 선인보다는 악인에 가까운 인물이 중심에 서서 사회의 모순을 정면으로 부수는 독특한 서사. 거칠고 위험하지만, 대신 주저함이 없다. 무엇보다 일단 ‘통쾌하다’. 정면돌파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정의의 이름이 아니라 개인의 방식으로 균열을 낸다. 그게 요즘, 시청자들이 악인 캐릭터에 열광하는 이유다.
악인 종합선물세트 〈악연〉
넷플릭스 시리즈 〈악연〉은 ‘목격남’(박해수), ‘주연’(신민아), ‘사채남’(이희준), ‘길룡’(김성균), ‘안경남’(이광수), ‘유정’(공승연)까지. 각기 다른 욕망과 사연을 지닌 여섯 인물이 얽히고설키며, 벗어날 수 없는 악연의 굴레에 빠져드는 이야기다. 패륜아부터 사이코패스까지, 누가 더 악한지 경쟁하듯 전개되는 서사는 매 회차마다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긴장을 끌어올린다. 그런데도 이 잔혹한 전개가 묘하게 통쾌한 이유는, 고통을 겪는 인물들 대부분이 ‘당해도 싼’ 악인들이기 때문이다. 죄책감 없는 몰입, 이것이야말로 〈악연〉이 선사하는 가장 강력한 쾌감 아닐까. 결국 이 작품은 악인들의 파노라마를 통해 시원한 ‘인과응보’의 서사를 완성해낸다. 총 6회지만, 일단 한 번 시작하면 시간이 순삭된다.
당한만큼 갚아준다! 〈보물섬〉
디즈니+ 시리즈 〈하이퍼나이프〉 스틸
SBS 금토드라마 〈보물섬〉 스틸
선한 얼굴의 박형식이 이를 제대로 악물었다. 현재 주말극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SBS 금토드라마 〈보물섬〉의 매력은 단연 샘솟는 도파민! 성공을 꿈꾸던 청년 서동주(박형식)는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음 직전에서 살아돌아온다. 그리고 시작되는 복수는 거침없고 처절하다. 빌런들의 악행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통쾌한 반격을 가하는 서동주의 모습에 시청자는 열광한다. 육두문자에 주먹, 칼질과 총질까지 오가는 폭력의 서사조차 박형식의 얼굴에선 ‘치명적인 매력’으로 작동한다. 다소 과격하고 불법적인 방식조차 용서받는 것은, 그가 철저히 ‘당한 만큼 갚아주는’ 악인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살인, 출생의 비밀, 치매, 기억상실 등의 소재가 지루할 틈 없이 쏟아진다.
하나 살리고, 하나 죽이고...〈하이퍼나이프〉
“하나를 살렸으니, 하나를 죽여야 지구가 좋아하지.” 목에 끈을 감고, 메스로 그어 사람을 죽이는 외과의사 정세옥(박은빈)의 존재는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반갑다. 살인을 망설이지 않는 이 주인공은, 차가운 윤리보다 자신의 기준에 충실하다. 그런 그를 키운 스승 최덕희(설경구)도 정상의 범주는 이미 한참 벗어났다. 가장 아끼던 제자의 의사 면허를 정지시킨 뒤 몇 년 만에 다시 나타나 뻔뻔하게 수술을 부탁한다. 알고 보니, 그 역시 사람 하나쯤 하늘로 보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이퍼 나이프〉는 도덕성을 탈의한 두 인물이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채 자유롭게 날뛰는 서사를 담는다. 그리고 이 위험한 자유가 주는 해방감은, 요즘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또 다른 통쾌함의 방식이다.
이들은 나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악인은 더 이상 단죄의 대상에 갇혀있지 않다. 오히려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꿰뚫는 캐릭터, 혹은 우리가 꾹 눌러온 욕망을 대리실현해주는 존재로 거듭난다. 통쾌함과 파괴력 사이에서 악인은 서사는 다시 쓰여진다.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더 매력적인가? 요즘의 드라마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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