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노 리프트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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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보이스] 노 리프트 라이프!

엘르 2025-04-08 11:34: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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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양평으로 이사 왔다. 결혼생활 13년 차, 열다섯 번째 집(관사)이다. 이번 집은 마흔 살 먹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꼭대기 집. 매일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한다. 늘 그랬듯 관사 입주자는 집을 고를 수 없기에 우리 부부는 층 배정을 아쉬워했지만, 아이들은 기뻐 보였다. 삶에서 처음 맞이한 긴 계단이 신기했는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 탐험가처럼 씩씩하게 올랐다. 가족이 서로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계단을 이어 오르는 모습이 우습고 사랑스러워서 히죽히죽 웃다가도 4층부턴 힘들어서 다 같이 네 발로 기어오른다.


사실 지난여름부터 양평 관사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전세를 구하러 다녔다. 관사가 있는 마을은 읍과 거리가 있었고, 인근 공동묘지와 닭 축사, 아스콘 시멘트 공장이 버뮤다 삼각지의 꼭짓점처럼 줄지어 있었다. 이번만큼은 들어가지 않겠다며 필사적으로 양평 전역을 뒤지고 다녔다. 이사 전까지 양평 땅을 열 번 정도 밟은 것 같다. 하루에 열 집 이상은 봤으니 어림잡아 100집 가까이 본 거다. 다세대, 빌라, 주택, 아파트까지. 어느 날은 터덜터덜 빈손으로 돌아오니 아이가 배고픈 눈으로 물었다. “엄마? 오늘은 집 구해왔어?” 나는 답을 얼버무린 채 옷도 벗지 않고 밥을 지어 먹였다. 그날따라 아이들이 밥을 맛있게 먹어줬다.


우리 가족에게는 이번 이사가 유난히 힘들었다. 전세 계약금까지 다 냈으나 대출이 나오지 않아 계약금도 날리고, 결국 전셋집도 못 구했다. 군인 가족 대상 전세자금 지원제도가 있었지만 사실상 심의해도 통과되는 집이 없다고 했다. 예산도 삭감됐다. 우리가 집을 보러 다닐 때만 해도 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가계약했지만, 그사이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예상 밖의 시련 앞에서 부정적 감정들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가장 크게 다가온 감정은 ‘불안’이었다. ‘이 집에서 내가 살아내지 못하면 어쩌지. 아이들이 아프면 어쩌지. 냄새는 얼마나 지독할까? 5층까지 오르내리기 힘들면 어쩌지.’ 내 마음은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자꾸 미래로 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불안보다 몸을 더 빨리 움직이면 불안이 나를 쫓아오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았다. 운동도 두 개씩 하고 틈나는 대로 친구들과 통화했지만, 이런 태도가 좋은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불안이란 감정은 회피할 때 몸집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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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후 아이들도 잔잔한 몸살을 앓았다.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첫째 딸이 밤만 되면 자기 방에 들어가기 무섭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방에 걸린 커다란 창문이 무섭다며 울고, 자다가도 엄마 곁으로 찾아왔다. 도시 풍경과 다른 시골의 고즈넉한 밤. 캄캄한 밤의 어둠이 낯설다고 울었다. 여러 번 달래다가 아이들과 이 불안을 직면하기로 했다. “얘들아, 엄마 옆에 앉아봐. 자꾸 어둠이 무섭다고 방 안을 환하게 밝히면 창밖 어둠은 더 캄캄하게 보여! 그래서 엄마는 지금부터 집 안의 모든 불을 끌 거야! 어둠이 무서우면 엄마 옆에서 잠시 눈 감고 기다려보렴. 어둠도 자세히 보면 환해.” 나는 모든 불을 끄고 딸의 방에 둘러앉아 아이의 불안을 함께 느껴주며 밝음을 기다렸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서로의 실루엣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이제는 집 밖이 더 밝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할 때 나는 밤의 장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시골에선 논 옆 가로등도 밤이 되면 잠을 잔대. 벼도 어두워야 잘 자라거든. 밤이 있어야 모두 쉴 수 있고, 힘을 충전하고 성장할 수 있어.”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작은 취침 등부터 하나씩 켜주기 시작했다. 작은 몸집에서 나온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워 어둠을 물리자 두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 관사에 들어오기로 결정했을 때 내 운명을 원망했다. 나를 구원할 리프트도, 비빌 언덕도 없다는 사실에 슬펐다. 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 없이 오르내리는 집이 얼마나 있겠느냐며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불안과 마주했을 때 내 불안보다 더 큰 걱정이 다가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감정을 인지하고 해소해 나가다 보니 내가 가진 불안의 타래까지 풀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몰려올 때는 두려움에 폭삭 망해버린 나를 상상해 본다. 진짜 다 망했다 치자. ‘그래서 망하면 어때서?’라는 씩씩한 답이 돌아오니까.


아이들과 어둠 안에서 용기 내 머물러본 것처럼 막상 부딪혀본 불안은 예상보다 훨씬 괜찮을 수 있다. 이사하고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있을 때 탄탄해진 허벅지와 꽤 괜찮은 공기가 느껴지는 것처럼 아이들의 인내심과 허벅지 근육도 많이 길러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 이사 와 모든 일이 잘 풀렸다며 이 관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말하는 귀여운 이웃 동생도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봄이 왔다. 반듯하게 나뉜 절기와 계절이 우리 의지와 다르게 다음 무대를 재촉하는 것처럼 나의 이사는 그렇게 계절의 역할을 한다. 내 의지대로 사는 곳을 정할 수 없는 삶. 하지만 때에 맞춰 환절기처럼 몸살을 앓고 성장하는 삶. 외면하지 않고 수용한 나의 감정과 이 집이 선사하는 이야기를 앞으로도 잘 기록해 보려고 한다. 노 리프트 라이프 파이팅이다.


전지민

전 에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그린 마인드〉 편집장. 여성과 엄마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육아가 한 편의 시라면 좋겠지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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