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개봉 당시 선정성과 파괴적 상상력으로 전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었던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크래쉬'가 27년 만에 무삭제 디렉터스컷으로 돌아왔다.
지난달 26일 재개봉한 '크래쉬: 디렉터스컷'은 4K 리마스터링으로 화질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국내 초연 당시 검열로 잘려 나갔던 장면들까지 모두 복원해 원본 그대로의 충격을 체감할 수 있게 했다.
'크래쉬'는 제임스 G. 발라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원작자가 "영화화는 불가능하다"며 말릴 정도로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제작 당시 감독 본인조차 제작사와 소속 에이전시로부터 커리어를 망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으나, 그럼에도 크로넨버그는 끝내 이 영화를 완성시켰다.
줄거리는 방송국 프로듀서 제임스 발라드(제임스 스페이더)가 자동차 충돌 사고를 계기로 죽음, 쇠붙이 등으로 훼손된 신체 사이에서 새로운 성적 자극을 발견하며 시작된다. 충돌 사고에서 남편을 잃은 여의사 헬렌(홀리 헌터)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과 같은 쾌락을 좇는 비밀 집단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들은 자동차 사고를 통해 비정상적인 욕망을 해방시키고, 결국 통제할 수 없는 자기파괴로 치닫는다.
영화는 단순한 성애 묘사를 넘어, 욕망과 죽음이 맞닿은 경계에서 인간의 본능을 드러내는 독특한 시선으로 구성돼 있다. 크로넨버그 특유의 차갑고 기계적인 영상미, 부상당한 피부를 세밀히 포착하는 그로테스크한 연출, 철과 살이 교차하는 신체 변형적 이미지들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작품은 관능과 불쾌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교란시키며, 충격을 통한 몰입을 유도한다.
극중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탈은 상식의 선을 넘어선다. 교통사고의 충격에서 희열을 느끼고, 자동차라는 금속 덩어리 안에서 관계를 나누며, 윤리와 금기를 완전히 벗어난 욕망의 해방을 보여준다. 특히 로버트 본(엘리어스 코티스)이 이끄는 집단은, 실제 교통사고 장면을 재현하는 데 집착하며 죽음을 에로틱하게 재구성하는 행위를 벌인다.
이 영화는 당시 미국에서 NC-17(17세 미만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두 차례 수입 불가 판정을 받은 끝에 약 9분가량을 편집한 채 제한 상영됐다. 지금에야 재개봉이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상영관 확보나 관람 등급 문제에서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래쉬'는 예술성과 영화적 실험성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6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격렬한 논쟁 끝에 특별심사위원상을 수상했으며, 캐나다의 지니 어워즈에서 감독상, 각색상, 촬영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했다. 프랑스의 영화 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선정한 1996년 올해의 영화 1위에도 올랐고, 2022년에는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영화 음악 역시 이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워드 쇼어가 작곡한 배경음악은 차갑고 반복적인 금속성 음색으로 구성돼, 영화 전체에 음산하고 불편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인물들이 욕망의 끝으로 달려갈 때마다 흐르는 음악은 대사보다도 강렬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배우 제임스 스페이더, 홀리 헌터, 엘리어스 코티스 등은 각기 파괴된 인간 내면을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육체의 격렬함과 감정의 고요함 사이를 오가며 극단적 상황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특히 스페이더는 충돌의 쾌락에 중독된 남성의 불안정한 심리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크래쉬'는 단순히 자극적인 문제작이 아니라, 인간 욕망에 대한 급진적 질문을 던지는 실험적인 영화다. 27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가 여전히 유효한 충격과 논쟁의 대상임을 증명하고 있다.
극장가에 흔치 않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크래쉬: 디렉터스컷'은 예술과 금기의 경계를 가늠하고 싶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한 방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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