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신동' 이창호와 ‘황제’라 불렸던 조훈현. 지난 26일 개봉한 영화 <승부> 는 이 두 전설적 기사의 대결을 단순한 승부가 아닌 사제 간 철학의 충돌로 그려낸다. 절실함으로 채워진 제자의 수읽기는 결국 스승이 설계한 전장의 윤곽을 벗어나지 못한다. 바둑판 위에서조차 반복되는 역사, 스승을 죽이지 못한 제자는 결국 그의 세계에 남게 된다. 승부>
영화 속 조훈현은 형세(形勢)를 만들어내는 기사였다. 국면을 자신의 흐름으로 끌고 오며 유리한 싸움을 강제로 전개하고 때로는 자신의 급소를 드러내며 상대의 판단을 시험한다. 반면 이창호는 침묵하고 절제하며 실수를 기다렸다. 그의 첫 승리는 치밀한 계산의 바둑에서 비롯됐으나 영화는 그 승부조차도 조훈현이 스스로 형세를 거두어들인 무(無)의 수, 퇴각의 수 안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이창호는 분명 절실한 마음(切)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절실함은 형세를 전복시키는 적중(的中)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상대의 빈틈을 노렸지만 결국 조훈현이 마련한 그림 안에서 움직이며 조금씩 흔들렸다. 물론 이창호의 패배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은 아니었다.
판세 역전은 '나의 급소는 곧 상대의 급소'라는 점을 포착한 조훈현의 발끝에서부터 나왔다. 대국 중 조훈현은 종종 오른 다리를 규칙적으로 떤다. 긴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일정하고 불안이라기엔 지나치게 무심하다. 그의 다리 떨림은 전장을 설계하는 리듬이자 자신이 만든 형세에 확신이 섰다는 ‘승전고’와도 같다.
영화는 승률의 문제가 아닌 형세를 설계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보여줬다. 조훈현에게 중용(中庸)은 수신의 윤리가 아닌, 전장을 지배하기 위한 전략 언어였다. 중(中)하고 용(庸)하라는 원칙은 상대를 흔들면서도 중심을 놓치지 않는 균형의 기술로 재해석된다. 절실한 마음(切)으로 적중(的中)하고 죽기 살기로 그대로 유지하려는 정신을 뜻한다.
스승과 제자의 전쟁 구도는 단지 바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사 곳곳에서 유사한 사제 갈등 구조는 반복돼왔다. 고려 말 이색과 정도전, 조선 초 송시열과 윤증, 허균과 이달 그리고 정도전과 이방원의 관계는 모두 제자가 스승을 ‘죽임’으로써 사상을 계승하거나 세계를 새로 구성했던 사례로 회자된다.
물론 스승을 죽인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살해만을 뜻하지 않는다. 구질서 파괴, 한계 돌파 모두가 포함된다.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정치적 가르침을 받았으나 끝내 그를 제거함으로써 조선을 자신의 나라로 만들었다. 제자가 스승을 죽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가르침이 완성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작동한다.
바둑은 침묵의 전쟁이라지만 이 영화는 침묵이 왜 결국 적중한 수를 이기지 못하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공자는 '주역' 계사전에서 고분고분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것(順)은 형세를 바꾸기 위한 역(易)의 차례를 기다리는 자리라고 했다. 돌부처 이창호는 마치 계산기와 같은 절제의 수를 뒀으나 적중까지 나아가지 못해 스승을 죽이지 못했다. 그렇게 스승을 죽이지 못한 제자는 기존 세계 안에 남는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스승의 것이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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