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의 공군의 역할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크게 2가지, 폭격기와 전투기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병과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전간기 내내 으르렁거린 편인데, 여기서는 2차대전 시기의 영국군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2대전, 짝불알 콧수염의 군대가 단 6주만에 프랑스를 도륙한다.
그 이후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에 대해서는 대충 아실테니 이하 생략.
본토 항공전의 주역인 전투기 조종사들은 일거에 전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영국인들 중 이것이 매우 아니꼬와 배알이 뒤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폭격기 조종사들이었다.
영국의 폭격기 남작(Bomber barons)들과 전투기 글래머 보이(Fighter Glamour Boys)들은 이당시 대다수의 공군이 그랬지만 공군 내에서 라이벌리가 붙어있었다.
이 상황에서 전투기의 입지 상승이 곧 폭격기의 입지 하락으로 연결된건 당연할 노릇이다.
비행학교의 학생조종사 지원 1순위가 스핏파이어가 되고, 폭격기 조종사는 마치 전투기 못탄 패배자가 가는것마냥 낙인찍혔으며, 폭격기 조종사에게는 <버스 운전사>라는 멸칭이 붙었다. 심지어 전투기부대는 도시 가까이에 있어 입지도 좋은데 폭격기부대는 시끄럽다고 교외지역으로 방출당했다.
국민영웅이 된 전투기 조종사들이 팬클럽을 이끌고 술집을 돌아다니며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받는 꼬라지를 보다 못한 폭격기 조종사들, 날이 갈수록 폭격기와 전투기 양 사령부의 장병들 사이에선 충돌이 늘어갔다.
이 갈등은 링컨의 악명높은 펍, 사라센 헤드에서 폭발하였으니, 영국 공군의 비공식 역사에는 <뱀굴 전투>라고 회자되는 사건이다.
링컨의 펍 Saracen head, 통칭 뱀굴(Snake Pit)
링컨 일대에는 댐버스터 부대인 617중대를 비롯한 여러 중폭격기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2차대전 당시에는 'Bomber County'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근처의 펍에는 휴가나온 장병들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뱀굴>이라 불리는 Saracen head 펍은 워딩턴 기지의 폭격기 부대 조종사들이 여자를 후리러 가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문제는 근처의 딕비 공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141비행대대, 29비행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걔네들도 링컨으로 휴가를 나왔으며, 끓어오르는 인기에 힘입어 전통적으로 폭격기부대의 영역이던 '뱀굴'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뱀굴'에서 마주친 워딩턴 기지의 장병들과 딕비 기지의 장병들 사이에서 싸움이 났다. 여자를 두고 싸웠다는 얘기도 있고 거들먹거리는 전투기 조종사들이 꼴보기 싫었던 폭격기부대 장병들이 들이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류의 싸움 특성상 원인은 중요치 않고 암튼 뱀굴에서 둘이 싸운게 계기가 되어 뱀굴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다음날, 빡친 폭격기 부대에서는 전투기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한다.
워딩턴 기지를 이륙한 3대의 햄든 폭격기가 딕비 공군기지 상공을 비행하며 기열 전투기들을 향해 폭격을 개시했다.
밥먹다 뛰쳐나온 전투기 조종사들이 본 것은 하늘에 나부끼는 휴지의 폭풍. 햄든의 폭장량이 4000파운드 정도 되는데 그거 3대에다 휴지를 꽉꽉 채워서 기지 상공에 투하해버린 것이다.
미친놈들
당연히 전투기 조종사들이 가만있을리가 없다
다음날, 악기상으로 비행이 취소된 폭격기 조종사들은 휴게실에서 어제의 승리를 곱씹으며 낄낄대고 있었다.
그런데 11시쯤 마크가 없는 블레넘 폭격기 1대가 갑자기 워딩턴 기지에 날아와 착륙했다. 의아한 관제탑, 저놈은 뭔데 부대마크도 안달고 다니냐?
곧 블레넘에서 무전이 날아왔다.
'여기는 폭격기 사령부 소속 공군대령이다. 사령부에서 긴급히 전달해야 하는 중요한 명령이 있으니 당장 144비행대대장을 여기로 보내라'
헉, 왠 일로 대령님이? 놀란 144비행대대장이 헐레벌떡 폭격기로 뛰어갔다.
다음순간, 폭격기에서 내린 일단의 승무원들이 대대장을 잡아다 마대자루에 처넣고 기체에 태워, 어안이 벙벙한 관제탑 이하 부대원 일동을 뒤로 하고 곧바로 이륙해버렸다.
당시 29비행대대의 주력기는 블레넘 폭격기였는데 여기에 브라우닝 팩을 달아 전투기로 쓰고 있었다. 육안으로 보면 이게 폭격기 부대의 기체인지 전투기 부대의 기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제의 폭격으로 열받은 딕비 기지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블레넘 폭격기에 부대마크까지 제거해 교묘하게 폭격기부대 소속인것처럼 위장한 후 워딩턴 기지로 착륙, 폭격기대대의 대대장을 납치한 후 도주한 것이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워딩턴 기지로 끌려온 대대장에게 집게를 쥐어준 후, 어제 니들이 뿌리고 간 휴지를 다 주우라고 지시했다. 대대장은 청소를 마치고 나서야 석방되어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뱀굴 전투는 더더욱 격화되었다.
폭격기 놈들의 대대장에게 청소를 시킨 일을 떠올리며 낄낄대던 딕비 기지에 일단의 군종장교들이 방문한다. 장병들을 위문하겠다고 온 장교들은 정작 일정을 후다닥 스킵하고 부대를 떠나 사라졌다.
장교들이 떠나간 지 30분 뒤, 회관에 들어오던 어느 전투기 조종사는 29, 141비행대대의 부대 마크가 새겨진 애착 태피스트리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부리나케 장교들을 뒤쫓아갔지만 잡힐리가 있나
다음날 태피스트리들은 딕비 기지 앞에 던져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 옆에는 사진 한 장이 붙어있었는데, 워딩턴 기지의 장병들이 지들 장교회관 앞에 태피스트리를 걸어놓고 화목하게 웃고 있는 모습, 그리고 폭격기 부대의 대대견들이 태피스트리를 물어뜯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당연히 전투기 조종사들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며칠 후, 워딩턴 애들이 곧 복수를 하러 올거라 생각하고 경계태세를 강화하던 딕비 기지 일동. 일단의 전투기들이 날아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드디어 왔나? 하고 회관을 나가보자, 전투기들이 기지 상공에서 에어쇼를 펼치고 있었다.
대체 뭐하러 온거야? 우리한테 자랑하러 온건가? 하면서 15분동안 에어쇼를 관람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모자가 싹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딕비 기지 사람들이 에어쇼에 정신팔린 틈을 타 탈의실에 침투한 특작조가 모자를 싹 털어간 것이다.
모자는 생각보다 중대사항이다. 모자가 없으면 펍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시라 외출군기 꽉 잡고 있던 시절이었고, 모자 없으면 펍에 사복입고 가야하는데 그럼 여자를 못 후린다.
사복을 입은채로 가서 양 옆에 여자를 낀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비웃음당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한 폭격기 조종사들은 셀프 휴짤을 선택했다.
다음날, 보파이터 한대가 날아와 모자를 진흙탕에 처박고 도주했는데 꼼꼼하게도 주기한 이름표를 다 떼고 돌려줬다(...)
이제 링컨 곳곳에서는 전투기부대/폭격기부대 장병들이 마주칠때마다 크고작은 싸움이 터졌다.
이러면서 뱀굴전투의 여파는 사회로, 그리고 전투력의 문제로 뻗어나가 - 도를 넘기 시작했다.
훨씬 쪽수가 많은 워딩턴 기지에서는 물량으로 뱀굴을 장악하고 전투기 조종사들을 내쫓으면서 펍에 피해를 야기했다.
그러자 전투기 조종사들은 링컨-워딩턴간 도로의 중앙선을 지워버렸는데, 이건 폭격기 조종사들이 링컨으로 복귀할 때 쓰는 표식인데다 도로교통에도 지장을 주어 전투력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킨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양 기지의 사령관들이 개입해 강제 종전을 선언, 더 이상의 교전은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엄포를 놓고서야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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