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을 실제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앞다리에 몸보다 높은 목을 나무처럼 뻗은 이 신기한 동물을 직접 올려보면 경이로움에 ‘와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프리카에 서식지를 둔 기린을 우린 언제든 볼 수 있다. 보여주는 목적으로 동물원과 체험 시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전시동물이다. 최근 동물원에서는 전시에 대한 비판으로 교육, 보전 연구로 목적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전시동물은 여전히 존재하고 인간사회의 이해 관계 안에서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또 목적이 교육, 보전 연구로 바뀐다고 해도 실효성과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동물의 미래는 겉돌게 된다.
실물로 보는 동물은 처음엔 사람들에게 감탄과 흥미를 유발한다. 움직이는 호랑이, 사자의 하품, 큰 덩치의 코끼리는 아이들에게 신선한 시각적 자극을 줘 관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필요하다.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과연 교육의 전부일까. 우리가 동물 교육을 통해 얻어야 할 진짜 소양은 관심이나 감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고 그들을 존중하며 공존하려는 삶의 태도야말로 교육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전시 중심’ 교육은 그 목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은 다양한 기술 발달로 동물 교육을 다른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는 시대다. 증강현실, 고화질 다큐멘터리 등은 오히려 자연 속 동물의 본모습을 왜곡 없이 전달한다. 사람들은 동물원의 좁은 철창 너머가 아니라 야생 공간 속에서 먹고 자라고 싸우는 동물의 삶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감각적 체험을 넘어 동물의 삶에 대한 존중과 경외를 배울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또 체험동물은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동물을 만져야만 교감할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인간 중심의 위안이다. 우리가 포근함을 느끼고 정서적으로 위로받는 경험은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통해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낯선 동물을 반복적으로 사람 손에 맡기며 체험시키는 행위는 그들에게 감각적 폭력이 될 수 있다.
보전 연구라는 명분 또한 마찬가지다. 전시를 통해 멸종위기 동물의 존재를 알리고 관심을 끌어내는 일이 의미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전이라 부를 수는 없다. 보전과 연구는 동물의 생존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그 시작은 ‘야생과 유사한 환경 조성’이다. 그리고 이 환경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생태계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갖춰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어떤 동물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아는 것은 동물의 일생, 즉 한살이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며 언제 이동하고 주변의 동식물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아는 일이다. 이는 곧 생태를 이해하는 일이며 진정한 환경 조성은 인간의 눈에 보기 좋은 시설이 아니라 동물이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태적 연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복합적인 이해야말로 앞으로의 동물 교육, 보전 연구가 반드시 포함해야 할 핵심 내용이다.
궁극적으로 야생 전시동물은 사라져야 한다. 동물은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여 주기가 아닌 ‘함께 살아가기’를 해야 한다. 성숙한 어른으로서 후손에게 지속가능한 공존을 물려주고 싶다면 이제 동물의 존엄을 마음 깊이 생각해야 할 때다. 기린의 눈을 들여다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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