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내 심장에 첫 벽돌이 놓였다. 차가운 회색빛 외벽은 조선인의 가슴에 비수가 돼 꽂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선 독립을 꿈꾸는 이들의 숨죽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들의 눈물을 마시며 자랐다. 해방이 되던 날 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환희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태극기를 들고 달리던 청년들, 어린아이를 안고 울던 어머니들. 그들의 기쁨과 설움이 내 벽돌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1960년대 나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신음했다. 매연 섞인 공기가 내 폐부를 채웠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대전의 심장이었다. 부청 직원의 부산한 발걸음, 민원인의 한숨 섞인 하소연, 그 모든 것이 내 일부가 됐다. 그러더니 1970년대 말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섰다. 과학도시의 꿈이 피어오르던 그때, 나는 젊은 연구원의 패기 어린 발걸음을 지켜봤다. 그들의 눈빛에서 미래를 봤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늙어갔다.
결국 1996년 나는 버려졌다. 민간에 팔려 방치된 채 녹슨 철근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비둘기들이 내 창가에 둥지를 틀었고 담쟁이 넝쿨이 내 몸을 휘감았다. 시간은 나를 잊었다. 하지만 시민은 달랐다. 그들은 내 안에 새겨진 기억을 잊지 않았다. 3·8 민주의거의 함성, 4·19 혁명의 뜨거운 열기, 1980년 5월의 아픔까지. 내가 지켜본 모든 순간들이 그들의 DNA에 새겨져 있었다.
2020년 나는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 440억이라는 숫자보다 시민의 염원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해체 작업이 시작되던 날 나는 울었다. 88년 동안 참아온 눈물이 벽돌 틈새로 흘러내렸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벽돌 하나하나가 역사였다. 일제강점기의 고통, 해방의 기쁨, 민주화의 열망, 산업화의 아픔. 이 모든 순간이 먼지가 돼 흩날렸다.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난다. 더 이상 권력의 상징이 아닌 시민의 품으로. 내 안에서 울리는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희망의 메아리가 될 것이다. 과거 내 창문으로 보이던 풍경은 달라졌다. 트램이 달리고, 첨단 빌딩들이 솟아있다. 하지만 내 심장은 여전히 뛴다. 대전의 역사를 품은 채로.
나는 기억한다. 충남도청이 떠나던 날의 쓸쓸함도, 대덕특구가 세계적 과학도시로 성장하는 순간도, 모든 것이 내 안에 새겨져 있다.
복원이 끝나면 나는 문화공간이 된다고 한다. 좋다. 이제는 시민들의 웃음소리로 내 공간을 채우고 싶다. 예술가들의 열정, 청년들의 꿈,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대전은 조금 더 쉽게 과거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역사는 기억돼야 한다. 나는 여전히 이곳에 서 있다. 시대의 폭풍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온 것처럼. 내 몸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옛 대전부청사 건축물 연혁
1935년 대전읍, 대전부 승격 → 부청사 신축(1937년)
건축 당시, 부청사 외 대전상공회의소 공동 입주 (1~2층은 사무시설, 3층은 강당으로 사용)
1945년 해방 이후, 충남도청사와 함께 미군정청 입주
1949년 대전부, 대전시로 개편 (대전의 첫 시청사)
1959년 대전시청, 대흥동 청사(현 중구청사)를 신축 후 상공회의소로 전용(3층은 청소년회관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문화공연장으로 사용)
1996년 대전상공회의소 서구 둔산 이전 후 삼성화재에서 인수
2016년 소유주 변경(매입)
2020년 소유주 변경(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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