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의 보고, '신속한 복구 염원'
(의성=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의성을 덮친 산불에 전소된 고운사는 '신라의 천재' 최치원의 이상을 간직한 천년고찰이다. 조선 왕실 건축물인 연수전 등 빛나는 문화유산을 간직한 채 불교의 맥을 이어온 역사의 보고(寶庫)다.
최치원이 세웠던 가운루, 연수전 등 국가 지정 보물들이 화마에 소실됐다. 천년 역사의 고찰과 문화재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연합뉴스는 지난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고운사를 취재했다. 문화관광레저 월간지 연합이매진(imazine)에 기사를 싣기 위해서였다. 고운사는 숱한 문화재를 품고 있는 것은 물론, 경상북도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불자들에게 큰 의지처였고, 현대 도시 생활에 쫓겨 안식을 찾아온 탐방객들에게는 따뜻한 위안을 주었던 곳이다.
고운사가 하루빨리 복구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지난달 취재 당시의 고운사 모습을 전한다.
◇ 진정한 힐링과 맨발 걷기 '성지'로 통했던 고운사
입춘이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달 초·중순. 뾰족뾰족한 얼음 기둥이 수십m에 이르는 거대한 빙벽,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검푸른 하식 절벽을 지나 시골길을 3∼4㎞ 달려도 마을이나 상가는 나오지 않았다.
그 길 끝에 고운사가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고운사는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중 유일하게 근처에 사하촌이 없다.
고운사가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처로 꼽히는 이유다.
사하촌이란 큰 사찰 입구에 형성돼 절을 찾는 신도나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가나 관광단지를 말한다.
고운사 입구에는 세계 최초의 법계도림이 흰 눈에 소복이 파묻혀 있었다. 입춘을 시샘하는 함박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법계도는 신라 의상대사가 화엄경의 가르침을 210자로 요약한 게송을 만(卍)자 모양의 도형에 배치한 것으로 시작과 끝이 만난다. 게송을 읊으며 법계도림을 도는 것은 불교 수행법 중 하나이다.
법계도림은 법계도 모양으로 조성한 작은 숲이다. 고운사 법계도림에는 봄이면 분홍색 꽃잔디가 피어나 탐방객을 매혹하곤 했다.
산문에서 법당까지 이어진 흙길은 맨발 걷기 '성지'로 주목받던 천년 숲길이었다.
맨발 걷기 축제가 열리는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맨발로 걷는 인근 주민이나 템플스테이 손님을 마주치는 게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 꿈을 이루지 못한 천재, 고운 최치원
'외로운 구름'의 높은 이상을 간직한 고운사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뜻의 등운산(해발 624m)은 고운사 낙서헌 맞은 편 만덕당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니 떠오르는 달의 형상처럼 능선이 둥그렇고 원만했다.
그러나 높이에 비해 능선 길이가 짧아 경사가 급했다.
등산객의 발길이 뜸한 이유였다.
등운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고운사는 원래 이름이 '고운'(高雲 높은 구름)이었다.
통일신라 말기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이 절을 방문해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은 뒤 절집 이름이 그의 호인 '고운'(孤雲 외로운 구름)으로 바뀌었다.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 보편성을 주장하고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었던 사상가, 유학자, 문장가였던 최치원은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가는 난세에 태어나 끝내 뜻을 펴지 못한 비운의 천재였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상은 고운사의 천 년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져 왔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유학 가 6년 만인 18세에 당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에 장원 급제했다.
외국인이었지만 관리로 발탁돼 20세에 당나라 율수현위를 지냈다.
그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문집이자 한국 문학의 효시로 불리는 '계원필경'의 저자이다.
평생 1만 수 이상의 시문을 지었으며, 20권 4책으로 된 계원필경에는 시 50수와 문 320편이 실려 있다. 찬란한 청춘의 문장들이다.
당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꾸짖는 내용의 토황소격문은 과감하고 웅장한 문체로 당 전역에 그의 이름을 떨치는 계기가 됐다.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도 너를 처단할 논의를 마쳤느니라'라는 격문 구절을 읽던 황소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학과 관직을 뒤로 하고 최치원은 29세에 신라로 돌아왔으나 신분제인 골품제에 묶이고, 중앙 정계의 시기와 견제로 중용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에게 골품제 타파를 비롯한 사회개혁안인 '시무십여조'를 올렸으나 그 내용은 실행되지 못했다.
중앙의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는 6두품 출신이었던 그는 대산군(전북 태인), 천령군(경남 함양), 부성군(충남 서산) 등 변방 관리로 떠돌았으며, 38세부터는 이마저 내놓고 유랑했다.
42세 이후에는 합천 해인사에 은거해 타계 시점이 확인되지 않는다.
가야산과 지리산에서 신선이 됐다는 전설마저 내려온다.
유랑 중 찾은 고운사에서 그는 누각 두 채를 짓고 글도 썼다.
고운사 계곡을 가로지르는 가운루는 국가 지정 보물이었으며, 가운루가 내다보이는 우화루는 운치 있는 카페로 단장돼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두 누각도 이번 화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운사나 해인사 말고도 최치원의 흔적은 1천100년 세월을 뛰어넘어 각지에 뚜렷이 남아 있다.
부산 해운대는 최치원의 또 다른 호인 '해운'(海雲)에서 지명이 연유했다.
최치원은 이곳을 다녀가면서 '해운대'라는 석각을 남겼다.
하동 쌍계사에는 '쌍계 석문'이라는 석각과, 그가 비문과 글씨를 쓴 진감선사탑비(국보)가 남아있다.
함양에는 그가 태수로 재임할 때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조성한 관방제림인 상림이 오늘날 군민의 건강을 지키는 큰 공원 역할을 한다.
경북 문경, 충남 홍성과 보령, 경남 창원 등에도 그가 남긴 석각이 있다.
그가 필자로 전해지는 석각은 32곳, 그를 기리는 사우나 서원은 24곳에 이른다.
교통수단이 빈약했던 고대, 최치원은 어떻게 그 많은 곳을 다니며 자취를 남길 수 있었을까.
그의 흔적들은 무엇보다 반평생에 가까운 오랜 유랑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과 학식에 대한 민초들의 흠모와 존경이 담기지 않았다면 그 자취들은 오래 보존되지 못했을 것 같다.
유학의 종조로 여겨지는 최치원은 불교,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고, 유·불·선 사상의 통합론을 펼쳤다.
고운사 초입에 있던 최치원문학관도 불탔다.
◇ 절에서 마주친 솟을대문…연수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사찰 7개 중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등 2곳이 고운사의 말사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소장처로 알려진 안동 광흥사, 훈민정음 언해본을 목판으로 판각했던 곳인 영주 희방사,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 사고를 간직했던 봉화의 각화사도 고운사 말사이다.
의성, 안동, 영주, 풍기, 영양 등의 크고 작은 사찰 60여 곳이 말사인 고운사는 조계종 본찰 중 교구 안에 천년고찰과 전통 사찰이 가장 많은 곳으로 통한다.
희귀한 문화재가 풍성했던 배경이다.
고운사의 가운루, 연수전, 석조여래좌상 등이 보물이다.
이 중 연수전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조선 왕실 관련 건물이다.
솟을대문이 달린 이 전각은 왕의 장수와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덕망이 높고 연로한 관료를 예우하기 위한 관청인 기로소가 있었다.
신하들은 만 70세가 되면 기로소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장수했던 네 왕도 기로소에 등재됐다.
연수전은 1902년 고종의 기로소 입사를 기념하여 1904년에 세워졌다. 영조가 기로소에 등재됐던 1744년 어첩을 모셨던 어첩봉안각이 연수전의 전신이었다.
어첩은 기로소에 보관하는 임금의 입사첩으로, 생년월일, 입사 연월일, 어명, 아호 등을 기록했다.
연수전은 왕실 건축에 어울리는 격식과 기법, 장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왕실과 사찰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였다.
우화루에 그려진 호랑이 벽화는 특히 탐방객의 사랑을 받았다.
호랑이의 눈이 움직이는 관객을 따라 이동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 '삼소식' 세계화 향한 고운사찰요리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공양 전에 암송하는 공양게이다. 오관게라고도 한다.
절에서 하는 식사를 공양이라고 한다.
고운사는 전부는 아니지만 공양간 식재료를 주지인 등운 스님과 절 식구들이 직접 지은 농사로 조달했다.
템플스테이를 하는 손님들로부터 공양간 푸성귀가 신선하고 아삭아삭하다고 호평받았다.
사찰음식의 비법은 장수를 부른다는 '삼소식'이다.
삼소식은 '적게(少), 곡채(蔬) 위주로, 웃으며(笑)' 먹는다는 뜻이다.
고운사는 삼소식을 기초로 한 '고운사찰요리'를 전파하기 위해 사찰음식체험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고운사는 다른 절에 비해 훨씬 많은, 17개의 공익 기관과 복지시설을 운영해왔다.
고운청소년재단, 안동청소년문학센터, 경북불교문화원, 영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 등이다.
자체 운영하는 곳이 4곳, 위탁받아 운영하는 기관이 13개소이다.
고운사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려는 불교 현대화, 사회의 그늘을 돌보는 자비 나눔으로 주목받았다.
역사와 문화의 보고였던 고운사의 신속한 복구를 기원한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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