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추진 중인 3조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두고 "개미들의 뒤통수를 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주주배정 방식 유상증자를 받을지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맡겨졌음에도 일부 투자자는 "왜 미리 설명하지 않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시장은 담담하다. 유증 발표 이후 주가는 오히려 올랐다. 불확실성 해소와 사업 확장의 신호로 읽은 것이다.
유상증자가 김동관 부회장 등 3세 승계의 수단 아니냐는 플랫폼 액트 등 주주행동주의자들의 반기업 선동도 뒤따랐다. 하지만 자본시장에서 유상증자는 지분율을 조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업 확대를 위한 투자 행위일 뿐이다. 오히려 신주 인수를 위해 수천억을 넣어야 하는 대주주 입장에서는 재무적 부담이 더 크다. 지배력 강화를 위한 시나리오라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벌 3세의 경영권 승계나 지배력 강화를 겨냥한 공세는 최근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한화그룹 경영진에 부여한 양도제한조건부(RSU) 주식 보상을 두고도 "경영권 세습용 보상"이라는 비판이 붙었다. LG화학-LG에너지솔루션의 물적분할 이후 상장을 추진했던 사례와 심지어 LS일렉트릭이 비상장 피합병법인인 KOC의 상장을 추진하는 것조차 '중복 상장'을 통한 '구자은의 지배력 강화'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에 비춰보면 이런 비판은 무리다. 경영진이 합리적 절차를 거쳐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판단을 적법한 절차에 맞춰 했다면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법적으로는 보호받는다. 이 원칙은 경영 판단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기업가 정신이 살아남는다는 철학에 기반한다.
미국에선 경영 실패로 인해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이사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 일은 원칙적으로 없다. 사기(Fraud)나 기망 행위가 없는 한 단순한 판단 착오로 인한 손해는 민사상 책임의 영역이다. 한국처럼 '임무 위배'만으로 형사 처벌을 가능케 하는 배임죄 규정은 없다. 이런 차이는 기업 환경을 둘러싼 사법 시스템의 기본 철학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 법원은 CEO가 지배주주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한 경우뿐 아니라 CEO와 지배주주가 동일 인물일 경우에도 경영판단 원칙을 적용해 법적 지위를 보호해 준다. 단지 대주주라는 이유로 판단의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국내에선 일부 상법 개정론자들이 이사의 충실의무(duty of loyalty) 개념까지 자의적으로 주주로 확장해 해석한다. 원래 이 의무는 회사를 향한 것이며 주주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모든 경영상 판단이 주주 개개인의 동의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들이 반복되고 있다.
경영판단의 영역을 정치와 여론으로 통제하려는 시도야말로 헌법상 보장된 기업의 자유를 옥죄는 퇴행이다. 따라서 이런 왜곡된 흐름을 불가역적 상황으로 만드는 상법 개정안에 대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는 헌법 질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모든 M&A나 유증, 사업 재편이 국민 여론을 거쳐야 한다면 이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허락을 받아야만 굴러가는 '면허제 경제'일 뿐이다. 경영은 책임의 영역이자 권한의 영역이다. 투자자는 투자로, 경영진은 판단으로 각자의 몫을 다하면 된다. 권한을 무시한 감정적 간섭이 늘어날수록 한국 자본시장은 '합리적 위험' 대신 '허락받는 안전'만을 좇는 저위험-저성장 구조에 갇히게 된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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