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원 칼럼] 치료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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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원 칼럼] 치료의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①

문화매거진 2025-03-24 18:27:3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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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그러고 보니 이 길을 8년간 지나다닌 셈이다 / 그림: 정혜원 
▲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그러고 보니 이 길을 8년간 지나다닌 셈이다 / 그림: 정혜원 


[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프리랜서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회사에 다니지 않고도 십 년 넘게 잘 버텨 왔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작년에는 내 페이스를 잃고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만 같고 영영 그 잘못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때마침 일감이 끊긴 탓이 크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8년간 이어져 온 정신과 치료에 급작스럽게 마침표가 찍혔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원인 모를 오른쪽 반신의 마비였다. 대학원 입시를 준비할 때부터 이따금 오른손이 마비되곤 했다. 가까스로 대학원에 들어가 2년간의 과정을 마칠 때까지 마비는 사라지기는커녕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맨 처음에는 증세가 일주일에 한두 번에 그쳤다. 그랬던 것이 나중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다. 급기야는 오른손에서 오른팔로, 오른팔에서 오른 다리로 점점 번져 갔다. 마비가 시작되면 뜻대로 글씨를 쓸 수도 타자를 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감이 코앞이어도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마비가 찾아와도 가급적 시치미를 떼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때면 급작스레 마비가 찾아올까 두려워 나도 모르게 몸을 사렸다. 그런 내 모습은 마치 주어진 임무를 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안한 한편, 억울했다.

몇 년에 걸쳐 마비가 심해지고 있으므로 만약을 위해 대학병원에서 근전도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몸에서는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몸의 문제가 아니라면 마음의 문제일 터였다. 집 근처 정신과를 찾았다. 여러 병원 중에서 어디가 더 좋은지 견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갔다. 평상시 오다가다 보던 동네 병원으로,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마비 증세를 누그러뜨려 일과 공부,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약을 탈 요량이었다. 그런데 의사는 내게 약물 복용뿐만 아니라 심층 상담도 권했다. 내 가난한 사정을 배려하여 보험을 적용해 준다고 했다. 합리적인 가격에 상담해 준다고 하니 솔깃했다. 꼭 기회처럼 여겨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치료가 시작되었다. 꾸준히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먹으며 매주 50분씩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비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마치 끈질길 불청객처럼 그 후로도 한동안 툭하면 찾아왔다. 상담 도중에 마비가 시작되는 일도 잦았다. 남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의사 앞에서 마비가 시작될 때면 당황스럽고 창피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마비는 사라졌다. 알게 모르게 자취를 감춰 언제인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 치료를 시작한 지 대략 2년쯤 되어 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2년이나 치료했고 마비도 사라졌으니 슬슬 치료를 끝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의사의 존재에 너무 길들어 버렸다. 살면서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그토록 살뜰히 귀를 기울여 준 적이 없었다. 갑자기 의사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서운할 것 같았다. 끝을 떠올리기만 해도 덜컥 겁이 나서 차마 언제쯤 치료가 끝날지 물어보지 못했다. 의사도 내게 언제 끝내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약 없이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착실하게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한 번도 상담에 늦거나 약을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끝나기 마련이다. 머리로는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니 어른답게 분별을 발휘해서 적당할 때 끝내면 좋았을 텐데.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못한 성격을 그때만큼 후회한 적이 없다. 헤어짐이 무섭다는 이유로 질질 끌어온 치료는 기어이 파국을 맞고 말았다. 원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집을 불려 온 의사에 대한 나의 반발심이었다.

치료 기간 내내 나는 프리랜서로서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일감이 없을 때면 생활비 걱정에 허덕였고 일감이 몰릴 때면 시간에 쫓겨 허덕였다. 그런데 일감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일감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애당초 보수가 터무니없이 적어 이러나저러나 허덕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 삶은 그야말로 일그러져 있었다.

의사는 딜레마에 빠진 내 사정을 파악하고는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일감을 받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주었다. 이를테면 크○이나 숨○ 같은 프리랜서 중개 플랫폼에서 자리를 잡아 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혼자서만 끙끙 앓지 말고 거래처에 내 요구와 고충을 확실히 전달하라고 권했다. 나는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착실히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치료받는 8년 동안 내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프리랜서 중개 플랫폼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단가 후려치기가 횡행하는 전쟁터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보니 계속 참전할 의욕과 용기가 싹 가셨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저보수 고강도 노동에 지쳐 있었기에 더는 나 자신을 그런 일에 갈아 넣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경험이다, ‘언젠가는 나아질 거다’라며 믿고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거래처와도 긴밀히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일의 강도에 걸맞은 보수를 달라고, 다음 일정을 미리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거래처에서는 명백히 난색을 표했다. 내가 하는 일에 책정된 보수는 원래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었고, 내 일정 같은 건 거래처의 알 바가 아니었다. 주어진 조건이 싫으면 내가 관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입 다물고 얌전히 일할 사람은 많았다. 나는 편리하게 쓰고 버리는 장기말에 불과했다.

내 삶이 변하지 않은 탓에 나는 상담 시간에 늘 엇비슷한 푸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덩달아 의사도 내게 늘 엇비슷한 조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조언이 점점 지겨워졌다. 반발심마저 들었다. 의사가 하는 조언은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얄팍한 대안,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탁상공론처럼 들렸다. 

마음 한편에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가던 어느 날, 참지 못하고 불만을 입 밖에 흘렸다. 상담이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고, 늘 뻔한 조언으로 끝나는 것 같다고 불쑥 말했다. 의사는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시간을 내어 상담을 진행할 필요가 없겠다고 내게 단호히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부로 모든 것이 끝났다.

지금도 종종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나눈 말, 서로의 몸짓과 표정, 진료실 안의 분위기를 점검한다.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건 아닐까, 조금 더 원만하게 치료를 끝낼 수는 없었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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