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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정신없이 마감할 때 했던 연애가 가장 재밌었고, “도대체 너의 이상형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지겨울 만큼 다양한 범주의 애인을 만났다. 늘 결혼을 원했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던 내가 팬데믹을 기점으로 결혼이 나를 비껴간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2020년부터 정신없이 흘러간 5년 동안 내 나이는 마흔을 넘었고, 인간관계가 빠르게 축소됐으며, 하루를 3부제로 쪼개 일해야 할 만큼 바빴다. 여전히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부풀고 있었지만 어쩐지 ‘자만추’ 기회는 반의 반 토막이 났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비혼으로 확정하기 시작했다. 긴 사연을 여기에 다 풀진 못해도 나는 늘 결혼이 하고 싶었다.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아직 못 하고 있다는 말을 주변에 할 때 한 번도 주저하거나 더듬어본 적 없다.
지난해 연말, 결혼정보회사 방문을 결정한 결정적 이유는 이곳이 ‘업무대행업체’라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세탁대행업체, 세무대행업체, 직구대행업체, 제철채소 정기 배송 업체 등 생활 편의를 위해 내가 위탁하고 의지하는 업체가 이렇게 많은데 내 소개팅 주선을 대행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데이팅 앱, 부모님 주선 맞선, 친구들의 소개팅, 동호회와 지인 모임 참석 등 결혼으로 가는 다양한 루트 중에서 가장 에너지 소모가 적은 방법이자 내 평판이나 자존심, 시간을 크게 잡아먹지 않으면서 오로지 통장만 조금 세게 털어가는 방법이라는 생각. 그 생각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자존감이 안 털린다고? 결정사, 현타, 이 단어로만 검색해도 후기가 수두룩한데 괜찮겠어?” ‘결정사’에 가입한다고 했을 때 미혼 친구가 가장 먼저 했던 말이다. 물론 나도 다 검색해 봤다. 하지만 기록과 검증이 가능한 스펙을 가지고 시작하는 판이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황인데 굳이 감정적 타격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흔히들 이야기하는 ‘ 마흔 넘은 여자’라든가, ‘용모가 변변찮은 마흔 넘은 여자의 점수’ 같은 것의 지겨움과 역겨움, 세속성은 익히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능숙하게 깔고 앉아 조금만 견디면 내 에너지로는 도달하지 못했던 만남의 장이 삐그덕 열리고, 그 안에서 누구의 기준도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좋은 사람을 찾아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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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 번의 만남에 기백만 원을 투자했고, 나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는 고운 목소리의 매칭 매니저를 배정받았다. 이후 생각보다 많은 수의 상대 프로필을 메일로 전달받았고, 흥미를 유발하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한 사람도 생각보다 많았다. 그중 가장 궁금한 사람을 고르고 골라 매칭을 요청하면 반절 이상은 ‘까이는’ 패턴이 이어지고 있지만 생각보다 타격감은 크지 않다. 수락과 거절이 이어질수록 매칭 메커니즘을 나름대로 학습할 수 있었고, 나 역시 상대의 여러 스펙 중에서 어떤 것이 중차대한지 현실적인 우선순위를 챙겨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남이 성사돼 약속에 나갔을 때도 걱정보다 편안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그다음 스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만나보고 싶으면 클릭 한 번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더 이상 연락이나 만남을 지속하고 싶지 않으면 매칭 매니저를 통해 감정 소모 없이 해결할 수 있으며, 정말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는 조건이 있을 때 인신공격의 오해 없이 이를 필터링해 실현할 수 있다. 물론 ‘결정사에 가입하는 남자’의 풀이 극히 제한적이고, 재정적 안정성이 수반돼야 결정사 가입을 생각해 본다는 사실 때문에 상대 남성들이 약간 비슷비슷한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가입 전에 예측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럼에도 샅샅이 한번 찾아보겠다는 모험가의 기질이 다행히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오늘 만남, 마음을 열고 잘하고 오시길 바랄게요. 조건을 다 알고 만남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결’이 비슷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예전에는 이걸 ‘코드’가 통한다고 했고 그보다 더 전에는 ‘필’이 맞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도 결혼에선 이게 제일 중요한가 봐요.” 두 번째 만남을 마쳤을 때 매칭 매니저가 해준 말이다. 수만 쌍을 결혼시킨 결정사라도 결이나 코드, 필을 데이터화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겪어보니 너무 잘 알겠다. 때문에 자기소개서에서 드러나는 문장의 어미를 붙잡고, 기재돼 있는 커리어 변곡점의 곳곳을 붙잡고, 부모님의 직업이나 형제 정보 부스러기를 붙잡고, 이 사람이 나와 어떻게 결과 코드, 필이 맞을지 추론하는 일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기회와 기대의 힘으로 내일도 나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러 나가기로 했다.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소개팅 대행업체에 가입해 놓고 스펙 그 이면의 경향성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 좀 웃기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결혼이라는 밥상을 엎지 않을 여지가 되기도 한다.
올해 내가 결혼 근처에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유사 사회인류학자가 되거나, 해탈해 버린 미혼 여성이 되거나, 100%는 아니어도 일단 가보자고를 외치는 사람이 되거나, 결국엔 스펙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외치는 결혼 꼰대가 되거나…. 무엇이든 ‘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 있을 테니 후회는 없다. 나에게 아직 여섯 번의 만남이 남았으니까.
전혜선
브랜드 콘텐츠 디렉터로 고군분투하는 프리랜스 직업인. 요리와 인테리어, 결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둔 지 20년째지만 그 무엇도 그럴싸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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