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지치고 지겹습니다. 이제는 뉴스에도 흥미를 잃었어요."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 꼬박 세 달이 넘었다.
지난 12월 3일 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시점까지 포함하면 '탄핵 정국'은 넉 달째를 향해 가고 있다.
윤 대통령에 대한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이 거리로 나와 집회를 이어가는 상황도 이제는 일상이 됐다. 탄핵심판 선고를 앞둔 지난 주말에는 서울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서울 지하철 안국역에는 탄핵 선고일에 역을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걸리기도 했다.
정치인들도 집회에 가세해 '거리정치'에 나서며 목소리를 냈다.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양진아 씨는 "이젠 별 기대감도 없다"며 회의감을 드러냈다.
양 씨는 "처음에 친한 친구들끼리 모이면 대화 주제가 거의 탄핵 관련된 이야기였다"며 "하지만 지금은 탄핵 정국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잘 안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냥 찬반 집회에서 자극적으로 행패 부린 시위자들의 소식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상황에 대한) 분노는 있지만 이제는 덤덤하고 지친 상태예요."
'번아웃'이 온 시민들
몇 달째 쏟아지고 있는 탄핵 뉴스에 '번아웃'이 온 일부 국민들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문화및사회문제심리학회 학회장이자 삼육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서경현 교수는 "요즘 뉴스는 절반 이상이 탄핵 관련 내용"이라며 "이것이 사람들의 막연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혼란스러운 탄핵 정국에 '번아웃'을 경험한 사람 중 하나다.
"제가 딱 그랬어요. 나중에는 뉴스 기사를 아예 읽지를 않게 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안정된 삶 속에서 지난해 말 계엄이 선포됐고, 연말에 항공기 사고도 터지면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보니 뉴스를 보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는 "인간의 몸은 '항상성'이라고 해서, 안정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자신의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데서 회의감이 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안정감이 사라지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을 통제하려고 해요. 그래야 불안이 없어지거든요. 그런데 통제의 소재가 지금 외부에 있잖아요. 그 상황에서 뉴스를 계속 보고 있으면 지치고 불안할 수 밖에 없어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시민들 중 일부는 시위에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 서 교수의 설명이다.
"누군가는 시위에 나서고, 누군가는 직접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집회 참가자들의 음식값을 대신 지불해 준다든지 등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 힘을 보태려고 하는 겁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는 "탄핵 정국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여댱이 서로 정권을 잡겠다고 탄핵을 남발하고 혼란을 부추기는 등의 행태가 결과적으로 나라를 더욱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과연 언제까지 가야만 끝나는지'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 여러모로 지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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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야기에 가족끼리도 틀어져'
시민들을 피폐함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양극화되고 있는 사회다.
윤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구치소 앞에서는 대통령 지지층의 목소리와 탄핵 찬성파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들려오기도 했다.
대통령이 구속되던 날에도 한남동 관저 앞 한 편에서는 환호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반대편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성기를 이용해 상대방 측 시위대를 향해서 비난을 쏟아내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서이종 교수는 이러한 모습이 비단 집회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명절에 큰집에 모여서 정치 이야기를 하다 친척들 간 논쟁이 되고, 그게 격화되어서 서로에게 언어폭력을 하고, 결국은 사이가 틀어져 만나지 않게 된 가족들도 굉장히 많아요. 양극화 된 시민사회가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는 결과입니다."
BBC 코리아가 만난 20대 김민욱 씨는 "이번을 계기로 알고 싶지 않던 주변인들의 정치색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미디어와 알고리즘을 편식하면 쉽게 편향된 정치 프레임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와 나이대가 비슷한 친구 중 한 명이 소위 말하는 '극우' 유튜브를 즐겨 보다가 '극우' 사상에 빠져서 다른 친구들에게 그런 단체에서 쓴 책을 사서 선물하더라고요."
김 씨는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흑백논리처럼 편가르고 분리되고 이런 게 너무 심각하다"고 말했다.
"계엄선포 이후부터 현재까지, 여야까지도 점점 선명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질까
서이종 교수는 리더십 공백이 몇 달간 이어지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내가 정권을 잡으면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에 대해 시민사회의 믿음이 약화되고 있다"며 "국민은 안중에 없고 권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시민사회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시민들이 지쳐있다"고 덧붙였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죠."
이어 "문제는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민주주의의 틀이 갖춰진 지 오래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한 명의 리더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좌우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라며,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지만 정치에 대한 기대가 많이 꺾여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상담심리학과 서경현 교수는 "본인이 뉴스 시청을 하고 싶지 않다면 뉴스를 잠시 차단하는 것이 좋다"며 "SNS를 잠시 끊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지금은 정보 공유가 너무 빨라요. 왜곡된 정보도 많고요. 특히 정치적 입장이 한 쪽으로 기운 사람들은 집단 심리에 의해서 자신이 믿고 있는 부분만 전해주는 편향된 뉴스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의 행동들에 강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실제로 최근 일부 언론사들의 편향 보도를 비롯해 SNS 상 AI 딥페이크를 활용한 가짜뉴스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4명은 딥페이크를 사용한 가짜뉴스를 구별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경현 교수는 "불안하거나 지쳐서 뉴스를 보고 싶지 않다면, 그것 또한 본능적으로 자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며 "그러한 신호를 무시하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럴 땐 오히려 뉴스와 거리를 두는 것이 낫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틀렸다' 보다 '다르다'라는 생각을 갖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내가 믿는 이념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까'하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논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거죠."
서 교수는 "'내가 나서서 뭐라도 해야겠다'라고 하는 마인드는 한국의 발전을 위하는 좋은 국민성일 수 있지만, 발전한 한국의 수준에 맞게 국민의 수준도 높아졌으면 한다"면서 "헌재에서 어떤 결정이 나든 상대 입장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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