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인권·시민단체들이 유엔(UN) 인종차별철폐협약(CERD) 심사를 앞두고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를 향해 인종차별철폐 의무를 저버렸다며 인권보호에 대한 책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
10개의 이주인권단체가 소속된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 20~22차 대한민국 심의 대응을 준비하고 있는 시민사회 사무국’은 21일 이 같은 내용으로 인권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오는 4월 29일부터 30일 대한민국은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의 가입국으로서 제도적·실질적 인종차별 실태 및 협약 이행 여부에 대한 20~22차 정기 심의를 앞두고 있다. 심의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제출한 국가보고서와 시민사회 및 인권위의 독립보고서를 토대로 협약 이행 실태와 개선 사항에 대한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평가와 권고를 받을 예정이다.
이를 앞두고 인권위는 지난달 24일, 지난 4일, 7일, 17일 총 4차례에 걸친 전원위원회를 통해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 제6차 심의 전 대한민국의 인종차별 실태에 대한 독립보고서 제출을 위해 논의해왔다.
그러나 강정혜, 김용원, 한석훈 등 일부 인권위원들이 독립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수정·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인권위는 이를 반영해 독립보고서의 원안을 각 주요 주제별로 검열하며 주요 권고 내용을 전면 삭제·축소하는 방향으로 조정 중이라는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인권위가 지속 유지해 왔던 입장이 담긴 원안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 △국가 주도의 인종차별 철폐 법제화 권고 △난민신청자 및 인도적 체류자 보호 조치 △이주노동자 권리 보장 등 핵심 내용이 삭제·축소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이들 단체는 “최종 독립보고서는 인권위가 그동안 수차례 해온 권고와 의견표명에 상반되고 정부의 국가보고서보다도 퇴행된 내용으로 제출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일부 인권위원들이 ‘대한민국에는 인종차별에 해당하는 인종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국인의 권리도 보장되지 않고 있다,’ ‘인종차별금지 법제는 국민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국내 문제는 국내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커졌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들은 “국제인권 메커니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망언”이라며 “이러한 주장은 인종차별적 집회에서 흔히 등장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으며 인권위가 독립적인 인권 보호 기구로서의 책무를 저버리고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기관으로 전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날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완 공동대표는 “협약에 가입했다는 것은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국제적으로 공식적인 약속을 했다는 것이며 협약 이행에 대한 법적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현재 인권위는 국가인권기구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반하며 비상식적이고 전문성 마저 매우 의심되는 내용으로 독립보고서가 논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한림세영 활동가도 “현재 인권위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인권위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반인권적 행태를 지속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며 “독립성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인권위가 정부나 혐오 세력의 입장을 반영하는 도구로 전락한다면 대한민국의 인권은 심각한 퇴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인권위는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국가인권기구로서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즉각적으로 독립성을 회복하고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현재 한국사회의 인종차별 상황에 대해 정리한 시민사회 측 보고서 발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이달 말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공식 제출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국내 시민사회단체는 다음 달 시민사회대표단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한국심의에 파견해 한국 정부와 인권위가 전달하지 못하는 한국의 인종차별상황에 대해 유엔 측에 제공하고 제대로 된 권고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이들은 기자회견이 마친 뒤 인권위원들에 대한 시민사회 서한을 전달했다. 서한에는 통해 대한민국 인종차별의 실태를 은폐하고 인종차별철폐 법제화를 저지하는 인권위의 반인권적 작태를 강력히 규탄하는 내용과 전원위원회 논의에 있어 인권위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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