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이자 방송인인 한해는 지난 2024년 한해 동안 한달에 한번 극장에 사람들을 모아두고 와인을 마셨다. 문자 그대로다. 용산 CGV의 한 관에 200명의 사람들을 초대해 그달의 와인을 함께 시음했다. 행사의 제목은 〈와인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다〉. 물론 와인만 마시는 것은 아니다. 매번 한 명의 게스트가 참여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 세션도 함께 진행했다. 조내진 소믈리에, 김성국 소믈리에, 갤러리 파운드리 서울 윤정원 대표, 밴드 옥상달빛의 박세진 등이 게스트로 참여해 한해와 대화하며 그달의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한 시즌이 끝났다. 1년 12회의 한 시즌을 끝낸 한해와 만나 어쩌다 와인에 빠졌는지, 그의 인생에서 지금 와인은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어쩌다 와인에 빠졌는지 궁금해요. 사실 소주 공화국에서 와인은 너무 마이너 장르잖아요.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이 와인을 그저 취미로 즐겼어요. 그런데 운이 좋게도 아무래도 티비에 출연하고 와인 유튜브도 하다보니 사람이다보니 와인 업계에 계신 전문가들을 쉽게 접할 수가 있게 되었죠. 소믈리에 분들, 수입사 매니저들 등등을 많이 알게 되더라고요. 그분들이랑 어울리게 되면서 점점 더 진지한 와인들을 마시게 됐죠. 그때부터 조금 심각해졌던 것 같아요. 더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내가 와인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 업계에서 뭔가 조금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건가요?
그런데, 뭐 아주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한 건 아니고요. 토크쇼인 〈한해 와인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다〉는 탭샵바의 나기정 대표가 진행하고 있던 와인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게 인연이 되었어요. 그 뒤에 따로 만나서 나 대표와 캐주얼한 와인 얘기를 나누다보니 ‘와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흥미롭더라고요. 오히려 이 토크쇼를 제안한 건 저였어요. 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를 하고 싶다고 역제안을 드렸죠.
유튜브 시리즈인 ‘와인 좀 한해’를 저도 굉장히 재밌게 보고 있어요. 연예인들 중에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정말 비싼 와인도 많이들 드시는 것 같고요.
그건 좀 약간의 오해가 있어요. 물론 고가의 와인을 마시는 연예인들이 많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와인과 자주 마시는 와인은 완전 다른 건데, 그걸 헷갈리거든요. 와인 애호가들에게 “좋아하는 와인이 뭐냐”고 물어보면 늘 자신이 마셨던 가장 인상 깊었던 와인을 얘기하죠. 그런데 누군가가 ‘저 콩스가르드 더 저지 좋아해요’라고 하면 대중들은 ‘와…더 저지를 좋아해서 자주 마시나보다’라고 오해하는 거죠. 수백만원 하는 그런 와인을 데일리로 마실 수는 없잖아요.
얼마 전에 박나래씨가 출연해서는 부르고뉴 샤르도네를 좋아한다고 하시더군요. 한해 씨는 가장 좋아하는 지역이 어딘가요?
저는 샴페인이요. 와인을 단 한 종만 마셔야 한다면 저는 샴페인을 마실 것 같아요.
그쵸. 평생 한 종류만 마셔야 한다면 샴페인이죠. 고기부터 디저트까지 모든 마리아주를 커버할 수 있으니까요.
맞아요. 점점 와인을 좋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레드 와인을 덜 마시고 샴페인과 화이트 와인을 더 마시게 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애착 지역은요? 참고로 저는 쥐라를 좋아해요.
저도 쥐라를 좋아해요. 처음 와인에 빠졌을 때는 산화의 뉘앙스나 내추럴 와인 특유의 느낌을 좀 안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엄청 좋아해요. 쥐라랑 알자스 쪽의 내추럴 와인들을 정말 좋아하죠.
샴페인도 그렇고 쥐라와 알자스를 생각하면 서늘한 지역을 좋아하시네요.
예 맞아요.
내추럴도 막 열대과인에 말린 자두향이 터지고 약간 쓸 정도로 브렛한 그런 펑키한 아이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죠?
그것도 맞아요. 제가 좋아하는 내추럴은 잘 컨트롤이 된 내추럴이에요. 마냥 쿰쿰한 향만 나는 내추럴은 별로 안 좋아해요.
샵에 가면 딱 손이 가는 또 다른 와인들이 있나요?
카비넷 등급 정도, 한 1~5만원 사이에 들어오는 독일 리슬링을 짭짤하고 시큼한 음식이랑 같이 먹는 걸 너무 좋아하고요, 이탈리아 와인 중에는 키안티 그리고 랑게 네비올로 좋아합니다.
레드 와인도 좀 섬세한 걸 좋아하시네요. 근육질의 남성미 넘치는 것들 말고요.
그런데 그런 남성적인 와인들이 아주 간혹 당길 때가 있어요. 추운 겨울에 고기가 먹고 싶을 때면 파워풀한 시라가 생각나곤 해요. 그래서 어제도 마셨어요. 또 좀 빈티지가 있는 보르도 레드들은 정말 너무 좋죠.
그런 건 누가 사줘야 마시죠.
근데 꼭 비싼 게 아니라도 괜찮아요. 마트에 가면 가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샤또의 오래된 빈티지들이 그냥 있는 경우가 있어요. 2008, 2009 빈티지들이 그냥 안 팔려서 그대로 있는 거죠. 그런 건 눈에 보이면 무조건 사요.
행사 얘기를 좀 해볼까요? 제가 ‘한해 와인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다’에 가봤는데, 와인 수준이 정말 높더라고요. 제가 간 날은 와인이 세 잔이 나왔었는데, 그중 하나는 샴페인이었죠. 그 정도면 샵에서 바이더 글라스로 와인 값만 4~5만원 나오겠더라고요.
사실 이미 대략적으로 감 잡으셨겠지만, 전혀 수익성이 없는 행사에요. 사실 좀 낚인 거기도 한 게, 와인이 너무 좋아서 와인 열정이 넘칠 때, 하겠다고 나선 바람에 1년을 하게 된 거죠. 그때는 별 게 아닐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정말 할 게 많더라고요. 스크립트도 제가 다 제가 짜야 되고 어떨 때는 게스트 섭외도 제가 도와야 하고, 와인도 함께 선정해야 하고요. 쉽지 않았어요.
흥미로운 건 그날 가보니까 N회차 관람객들이 꽤 많더라는 사실이었어요.
감사하게도 그런 분들이 좀 있으세요. 그런데, 행사에 오시는 분들의 성향도 챕터별로 나눌 수가 있더라고요. 처음 이 행사를 시작할 때는 음악하던 한해를 좋아해주시던 분들 위주로 오셨었어요. 그런데 점점 새로운 분들, 래퍼 한해가 아닌 와인 코디네이터 한해를 좋아해 주시는 사람들로 자리가 채워지는 게 보이더라고요. 특히 와인을 교양의 일부로 좀 배워보고 싶은 분들이 와인 토크콘서트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시는 게 좋았어요. 티켓이 3만원인데, 그냥 3만원 짜리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와인도 배운다는 개념으로, 문화 생활로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정말 한 푼도 남지 않겠군요.
맞아요. 제게도 최소한의 출연료가 있긴 하지만, 제 몫을 보통은 게스트 분들께 그냥 드렸어요.
봉사활동에 가깝군요.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아요. 제가 좋아서 시작했으니까요. 일단 흥미롭잖아요. 업계에 전혀 없는 구성의 행사였으니까요. 다양한 직업의 게스트를 초대해서 그들의 직업과 그들이 좋아하는 와인에 대해 얘기하며 관객들과 함께 와인을 테이스팅하는 콘셉트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WSET LEVEL 3를 공부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레벨 2를 이수하고, 3의 수업을 다 듣고 얼마 전에 시험을 치렀어요. 저는 일요일 하루에 8시간을 몰아 듣는 수업을 들어서 정말 피곤했어요. 남들 다 한다는 뒷풀이도 못 갈 정도로요.
다음 시즌은 준비하고 있나요?
사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다만 한 해를 하면서 느낀 바는 좀 있죠. 회차가 거듭될수록 반은 좋고 반은 아쉽더라고요. 두 번째 시즌을 하게 된다면 좀 더 갖춰서 하고 싶어요. 제대로 정비해서 좀더 격식있게요. 지금처럼 수익성이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겠죠. 지금 당장은 어렵겠고, 오랜 회의를 거쳐서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도 꽤나 활발하잖아요. 와인과 관련해서 또 준비중인 게 있나요?
좀 캐주얼한 오프라인 시음회를 열고 싶어요. 제가 지금 ‘솜즈’라는 소믈리에 크루로 활동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파인다이닝 헤드 소믈리에 들도 있고, 이제 막 직업 세계에 들어선 친구들도 있는 한 2~30명 규모의 모임이에요. 이 소믈리에 분들이 〈흑백요리사〉를 보고 다들 하는 말이 요리 프로그램인데 파인 다이닝에서 제일 중요한 주류와의 페어링이 빠져서 아쉽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분들이 주인공이 되는 오프라인 시음 행사를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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