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엄금희 논설주간]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왕은 장수왕이었다. 영토가 넓어지며 체제 정비의 필요성을 느낀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겼다.
장수왕 15년인 427년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였다.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고구려는 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 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장수왕 63년인 475년 고구려 영토는 안성에서 아산만과 소백산맥을 넘어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사실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 5세기 말에 고구려는 한반도의 중부 지방과 요동을 포함한 만주 땅을 차지하여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왕을 '태왕' 또는 '성왕'이라 불렀고,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높였다.
백제의 땅이었던 안성은 475년 이후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안성 미양로 866에 있는 도기산성은 이중 목책 산성 유적으로, 지난 2016년 10월 24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발굴조사가 이어져 2024년 9월까지 5차 조사로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구려가 활용한 목책성이 안성에서 확인된 것은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남진 경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1500년 전, 백제와 고구려의 주거지와 토루, 목주열 그리고 전사들이 사용했을 고리 자루 큰 칼과 쇠도끼와 쇠창 같은 무기류와 옥으로 만든 장신구 같은 출토 유물이 나왔다. 손잡이가 달린 검은 잔은 고구려인들이 검은색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성 도기산성은 이중 목책성이다. 목책성이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 시설로 흙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두르거나 말뚝을 박아 만든 성이다. 목책이 산 능선을 따라 걸쳐 있으며, 성곽은 자연지형을 따라 연장되어 있다. 안성 도기동 산성은 목책을 먼저 세우고 진흙을 발라 보강한 이중 목책성이다. 이는 목책에 진흙을 덧발라 화재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안성 도기산성에서는 백제 토기인 삼족기, 고배, 개배, 타날문 토기와 고구려 토기인 뚜껑, 파수, 접시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백제 한성 도읍기에 이 산성을 축조하였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고 고구려가 남하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이 산성을 사용하였다. 고구려가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든 산성은 여럿 있지만, 백제가 축조한 산성을 활용한 사례라는 점에서 사료의 가치가 충분하다.
안성 도기산성은 목책 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는 드문 사례로 사료로만 전해지는 삼국시대 목책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어 고대 토목 및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고구려가 활용한 목책성이 경기 남부 지역에선 처음 확인된다.
안성 도기산성은 안성천 남쪽 해발 78m 독립 구릉지대에 있어 안성평야를 바라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4~5세기 사이에 백제가 토축 성벽을 축조하여 사용하였고, 고구려가 남진하여 이 지역을 차지한 5세기 후반 이후 목책 성벽을 다시 축조하여 사용하였다.
한강 이남 지역에서 고구려 영역 지배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유적이다. 산성의 평면 구조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된 중성 구조이며, 북문과 남문의 문지 두 곳이 있었다. 규모는 내성 둘레가 약 1.4㎞, 외성을 포함한 전체 둘레가 약 2㎞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였던 도기산성은 668년 신라가 통일한 후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이 사라졌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터로 변모한 이곳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남겨놓았다. 청동발, 청동 숟가락, 청동 젓가락 등 청동 유물이 나왔다. 이런 유물들이 안성의 역사적 자산으로 안성맞춤 유기로 발전했다.
광개토대왕이 대륙을 통해 동북아로 나아갔다면, 장수왕은 일찍이 해상으로의 진출을 위해 그 발판으로 한강 유역과 안성 도기산성까지 남진정책을 펼쳤다. 장수왕은 길 장(長)에 목숨 수(壽)이다. 광개토대왕만큼 가장 많이 알려진 왕이다.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이름처럼 아주 장수했던 왕이다. 98살까지 살았다.
장수왕은 고구려 역사상 영토를 가장 넓혔던 왕으로 최전성기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 있다. 안성의 도기산성과 세종 남성골산성이다. 목책이 있던 구덩이가 있다. 목책을 세운 방법이 구덩이 길게 파고 군데군데 보통 전봇대만 한 큰 기둥 세우고 단단하게 점토로 고정을 시켰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바깥에서 돌과 흙을 이겨서 흙 담장을 쌓듯이 바깥에 벽체를 보강해서 올린 그런 상태로 나타났다.
5세기 말이라면 바로 고구려와 백제 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던 때다.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부대는 한강을 넘어 백제의 수도를 공격했고 일주일 만에 한성을 함락했다. 그리고 도망가던 백제 개로왕을 잡아 아차산 밑으로 끌고 가 목을 벤다. 이렇게 한성을 함락한 뒤 그 기세를 몰아 고구려군은 한반도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갔다. 그때 쫓겨 내려가는 백제군을 추격해 내려온 곳이 이곳 안성을 지나 청원지역까지이다. 금강 너머 불과 100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웅진이 있다. 백제의 새 수도인 웅진을 코앞에 두고 고구려는 성을 쌓아 백제와 대치했다. 목책성이지만 5m가 넘는 굵은 목책을 두 줄로 쌓고 그 사이에 진흙을 다져 넣은 뒤 마지막으로 불화살 공격에 대비해 바깥 면을 돌로 두른 견고한 성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어디까지 내려갔을까? 그것은 대전의 월평산성이다. 월평동 산성은 원래 백제가 6세기 말 7세기 전반에 쌓은 석성이다. 여기서 고구려 유물이 나오는 건 석성이 쌓이기 전에 구릉을 이용했을 때의 고구려 유물이다. 백제 성벽 아래쪽에 고구려 유물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유물을 보면 대략 4세기, 5세기 후반 5세기 말로 보아 장수왕의 고구려군이 계속 남하하면서 남겨놓은 유적이다.
고구려는 한성을 함락한 뒤 안성을 거쳐 곧바로 웅진 목전까지 밀고 내려가 백제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수왕이 이렇게 무서운 기세로 백제를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미 4세기 초부터 두 나라 간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4세기 초반 고구려와 백제 사이엔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다. 그런데 313년 고구려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바로 1년 뒤 대방군을 멸망시킨다. 이후 국경을 맞닿게 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엔 긴장감이 감돈다. 드디어 369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때 고구려 고국원왕은 백제에 참패한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전쟁이 벌어지지만 이때도 고구려는 무참히 패배하고 결국 왕까지 잃는다. 고구려와 백제 간에 전세가 역전된 건 광개토대왕에 이르러서였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남쪽으로 진격, 한강 이북의 58개성을 함락한다.
4세기는 백제가 가장 전성기였을 때이다. 고구려에게 백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평양 천도 이후 남진정책에 대한 장수왕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안성 도기산성은 진천 대모산성, 세종 남성골산성, 대전 월평산성 등과 함께 한강 이남 지역에서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경로와 영역 지배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더불어 삼국시대 목책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드문 유적이다.
그런 역사적 의미에서 향후 발굴 작업은 계속 되어야 한다. 또한 발굴 유물의 보존을 위해 안성맞춤박물관과 도기산성박물관(가칭)은 좀 더 큰 규모로 확대해 도기산성 아래에 안성박물관 건립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 꿈이 있다면 안성박물관이 완성되고 초대 박물관장으로 그동안 쌓아온 언론인과 경영인으로서 가졌던 역량을 이곳에 바칠 희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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