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명품 시장의 진화 위한 구찌·보테가 베네타의 변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전 세계 소비자들은 억눌린 소비 욕구를 해소하고자 고가의 명품 브랜드에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이러한 ‘보복 소비’는 명품 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과열된 소비는 2023년부터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고, 대중의 시각과 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케링 그룹은 ‘지속 가능한 럭셔리’를 제시하며 새로운 미래를 선도하고 있다.
명품 제국의 탄생
케링 그룹은 산하에 구찌를 비롯해 생 로랑,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알렉산더 맥퀸, 부쉐론 등의 브랜드를 운영하는 글로벌 럭셔리 기업이다. 2019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당시 1억 1,300만 달러를 보수기금으로 내놓았던 피노 패밀리 소유의 지주회사 아르테미스가 41% 지분을 가지고 있다.
케링 그룹의 시작은 목재·자재 판매였다. 프랑스 서부의 레샹제로라는 작은 마을 출신인 창업주인 프랑소와 피노 명예회장은 목재상이던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일을 도왔는데, 학교 상급생들이 ‘시골 촌뜨기’라고 놀려대자 열여섯 살 때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1956년 알제리 전쟁에 참전한 후 귀국한 피노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목재상을 매각하고, 1963년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1988년 자신의 이름을 딴 피노 주식회사를 파리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뒤 유통업에 진출한 그는 1990년대부터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패션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케링그룹의 전신인 PPR(피노 프랭탕 레두트)를 설립하고 ‘세기의 거래’라 불린 구찌 그룹 인수에 성공하며 럭셔리 산업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이는 단순한 브랜드 인수를 넘어 케링 그룹이 명품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도약하는 신호탄이었다.
구찌의 성공은 케링 그룹의 화려한 전성기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톰 포드가 1995년 합류한 뒤 관능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구찌의 10년 간 매출은 5억 유로에서 27억 유로로 여섯 배 가까이 늘었다. 이처럼 구찌가 기업의 성장을 이끄는 핵심 브랜드로 거듭나면서 케링 그룹은 럭셔리 제국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생 로랑 인수를 시작으로 부쉐론,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매카트니 등 여러 명품 업체들을 차례차례 인수하며 소매 부분은 점차 매각했고, 2013년 케링으로 회사명을 변경할 쯤엔 소매 부문은 완전히 분할되고 완전한 명품 브랜드 전문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도전
2005년, 창업주 피노 회장의 아들인 프랑소와 앙리 피노가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케링 그룹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87년부터 PPR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차근차근 승진해 회장이 된 그는 부친이 했던 것처럼 공격적인 M&A 전략으로 다수의 브랜드를 그룹에 추가했다.
이와 함께 지속 가능한 패션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며 환경 보호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영 철학을 실천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미 10년이 넘었다. 친환경 플랜을 가동하면서 회사 내에 친환경 플랜의 진전을 평가해 재무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한 새로운 회계기법을 뜻하는 ‘EP&L’ 계정을 열었고, 2017년에는 2025년까지 제품원료의 생산과 가공에서 발생하는 환경영향을 40% 감소시킨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2019년에는 탄소 제로 목표도 선언했다. 특히 대표 브랜드 구찌는 2018년 모피 제품 생산과 판매를 모두 중단하겠다고 선언해 패션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아울러 사회적 및 환경적 노력과 진척 상황을 알리기 위한 플랫폼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도 출시했다.
또한 케링 그룹은 최근 2030년까지 환경과 생물 다양성 보호를 위한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번 목표에 따르면 케링은 신선한 물 사용량을 21% 줄이고 토지 사용량을 3% 줄이며, 산림 훼손 지역에서 채취한 가죽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케링은 주요 원자재인 목재와 고무에 대해 인증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공급망 내 재생 농업의 확대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케링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관련 산업 내 지속 가능한 성장 이념을 존중하는 유대를 촉진시키도록 요청했고, 앙리 피노 회장의 주도 하에 32개 패션기업이 친환경 이념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협정에 조인하는 결실을 이루어 냈다.
앙리 피노 회장은 디지털 전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온라인 채널 강화와 디지털 마케팅 혁신 등을 통해 MZ세대 소비자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메타버스, NFT 등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브랜드 경험도 확장했다.
침체기 속 시험대 오른 리더십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주요 브랜드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며 앙리 피노 회장의 리더십은 시험대에 오른 상태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 등의 변화는 아직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구찌의 공백을 메우고자 발렌티노 브랜드의 지분을 인수하는 등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가장 시급한 과제는 브랜드 포트폴리오 재정비가 꼽힌다. 구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다른 브랜드의 성장을 촉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케링 그룹은 럭셔리 시장 점유율에 있어 구찌 브랜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 명품 시장은 고물가를 비롯해 경기 침체, 소비 심리 위축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침체기에 접어든 상태다. 특히 중국 시장의 성장 둔화는 명품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케링 그룹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새로운 도약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실제 케링은 2024년 4분기 결산에서 순이익이 전기 대비 62% 급감한 11억 3300만 유로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매출액 역시 12% 감소했는데, 특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소매 매출액은 24% 급감하며 전체 실적이 앙리 피노 회장은 결산 회견에서 “중국 부동산 시황 악화와 젊은 층의 높은 실업률이 소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앙리 피노 회장의 리더십에도 의구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기업 경영에 매진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 많다. 최근 케링 가문의 지주사인 아르테미스가 인재관리 기업인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에이전시(CAA)’를 인수한 것도 그가 회사 운영에 매진하고 있지 않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CAA는 톰 행크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등 유명인들이 대거 속해있는 기획사로 피노 회장의 아내인 셀마 헤이엑이 대표로 있다.
한편 케링 그룹이 어려운 시기에 직면한 가운데 승계 작업에 한층 속도를 내는 것으로 전해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앙리 피노 회장의 장남인 루이 니콜라 피노가 크리스티 경매장 이사회에 합류해 할아버지 피노 명예회장의 뒤를 잇게 되면서다. 크리스티는 피노 창업자의 애정이 담긴 회사다. 1766년에 세워진 크리스티는 영국의 유서 깊은 미술품 경매회사로, 케링 그룹의 지주회사인 아르테미스에 1998년 인수됐다. 피노 명예회장은 2003년 그룹 경영권을 아들에게 넘긴 후 미술계로 눈을 돌려 컬렉터로 활동 중이다.
이처럼 그간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통해 명품 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가던 케링 그룹은 변화의 기로에 선 상태다. 경영권을 넘겨 받은지 20년이 되는 올해 앙리 피노가 어떤 도약의 청사진을 그리게 될지 명품·패션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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