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반도체 연구개발(R&D)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하지 않는 ‘반도체특별법’이 야당 반대로 입법이 지연된 가운데, 정부가 특별연장근로기간을 회당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새로운 지침을 내놨다. 이를 두고 노동계에서는 노동자의 기본권을 희생하는 제도라며 반발에 나선 반면, 경제계에서는 현장의 애로사항을 반영했다며 환영했다.
13일 정부 발표를 종합하면 고용노동부(이하 노동부) 김문수 장관은 전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주재한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반도체 연구개발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보완방안’을 제시했다.
해당 방안은 반도체 연구개발 업종엔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를 기존 3개월에서 6개월 단위로 늘려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주 52시간 노동 상한 규제를 없애는 반도체특별법이 야당 등의 반대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자 노동부는 내부 지침을 바꾸는 방식을 택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현재 3개월 단위로 사용가능한 특별연장근로제도를 반도체 업종의 연구개발 인력은 6개월 단위로 쓸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을 신설했다. 현재에도 3개월 인가를 받은 뒤 3개월씩 연장해 1년 내내 특별연장근로를 할 수 있지만 이를 6개월+6개월로 쓸 수 있도록 간소화하겠다는 설명이다.
다만 6개월 중 후반 3개월은 주 최대 64시간이 아닌 60시간까지만 일할 수 있도록 조정하며 기업이 기존 제도와 새 제도 가운데 선택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지침 수정 배경에 대해 노동부는 “현행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업무처리 지침은 짧은 인가기간 등 반도체 연구개발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근로자의 건강보호 조치의 일환으로 특례 활용 시 건강검진 의무를 신설한다. 또 재심사 기준은 완화하되 핵심 요건(인가사유, 인가기간·시간, 건강보호조치 등)은 철저히 심사하도록 한다. 제도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온라인 불법 신고센터도 운영해 근로자 권익 보호 및 법 위반 사업주 대상으로 시정조치를 내릴 계획이다.
이는 법 개정이 필요 없는 행정지침 개정이기 때문에 현재 노동부는 일선 현장에서 다음 주부터 특례 신청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정부의 발표가 나오자 노동계는 일제히 반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에 따르면 2020년 이전까지 ‘재해·재난에 준하는 사유’로 한정돼 있던 인가 사유는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경영계의 요구로 ‘업무량 폭증’과 ‘연구개발’ 등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정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됐다. 그 결과, 2022년 기준 특별연장근로 인가 건수는 6477건으로 2020년 4204건 대비 1.5배 늘어났다. 업무량 폭증을 이유로 한 인가는 전체의 60%를 기록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등이 소속된 반도체특별법저지공동행동은 전날 성명을 내고 “장관회의 자료에는 ‘현장의 목소리’라면서 노동자의 목소리는 없고 노골적으로 기업의 요구만이 담겼다”며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은 안중에도 없고 철저하게 기업 편에서 노동시간 제도를 바꾸겠다는 의지만 보인다”고 규탄했다.
이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1년 내내 주 64시간씩 장시간 몰아치기 노동을 계속하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연구개발노동자들은 심각한 과로 누적으로 인해 창의적인 연구개발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과로사 위험, 심근경색, 뇌졸중 등 뇌심혈관계질환의 위험, 우울증 및 자살 위험, 사고위험증가, 대사증후군의 악영향 등 치명적인 건강 위험에 놓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도 지난 11일 성명을 통해 “또 다시 노동자 배제한 노동시간 논의, 특별연장근로 확대 검토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며 “정부와 자본은 반복적으로 노동자 의견을 배제한 채 자본의 이익을 위해 과로 조장, 건강권 침해 시도를 추진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반도체 연구개발직군 노동자들에게 특별연장근로라는 수단으로 주64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반년 내내, 1년 내내 주64시간 특별연장근로를 하면 그것이 특별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며 “이는 노동자의 기본권을 희생하면서 단기적 성과만을 우선시하는 행태로 자본과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개정 시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노동계와 달리 경제계는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다만 이번 개정이 근본적인 대책은 아닌 만큼 주 52시간 예외 내용이 포함된 반도체특별법을 조속히 입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 12일 낸 입장문에서 “글로벌 수요 둔화, 공급망 불안, 후발국의 추격 등 반도체 산업이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정부가 반도체 연구개발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 보완방안을 마련한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개정으로 연구 현장의 근로시간 제약이 다소나마 완화될 것으로 기대되며 이는 기술 혁신과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반도체는 미래 첨단산업의 기반인 만큼 R&D를 포함한 산업 전반의 경쟁력 확충을 위한 법적·제도적 지원을 조속히 마련해 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같은 날 “반도체특별법 입법 논의가 지연되면서 정부가 기업들의 고충을 반영해 반도체 연구개발 분야에 특별연장근로 인가 기간을 확대하는 등의 신속한 조치를 취한 것은 기업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반도체특별법의 조속한 제정과 근로시간제도 유연화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정부와 국회가 제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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