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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민주주의구나” 서로 달랐던 의견, 토론 통해 압축
헌재의 평의는 재판관 9명만이 참석할 수 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이뤄진다.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평의실에 재판관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연구관도 들어올 수 없다”며 평의의 비밀성을 강조했다. 서류가 필요하거나 추가 자료 요청이 필요할 경우에는 연구관이 들어와 전달하기도 하지만 퇴장한 후에야 다시 논의를 이어간다.
평의실에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재판관들 간의 치열한 토론이 벌어진다. 김용준 전 소장은 “처음에는 회의가 너무 산만하고 중구난방이었다. 대법원 회의와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며 “6개월이 지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서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가운데 하나의 결론 아니면 두 개의 결론으로 압축해내니까, ‘아, 이게 민주주의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돌아봤다.
◇절차 따르되 자유로운 토론…의문 푸는 과정
평의 과정은 일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우선 주심 재판관이 사건에 대한 보고를 한다. 정경식 전 재판관은 “주심이 보고를 한다. 보고서를 가지고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된다. 보고를 하고 내 의견은 이렇고 다른 문제점이 있다며 문제점까지 다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이후 자유로운 토론이 이어진다. 정 전 재판관은 “자기가 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의심되는 것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게 무슨 뜻이냐’ 보고서를 중심으로 해서 먼저 의문스러운 것을 문서로 풀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게 무슨 뜻이냐, 그러면 또 푼다”며 토론 과정을 묘사했다.
표결 과정에서는 후임 재판관부터 차례로 의견을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토론을 이어간다. 정 전 재판관은 “제일 후순위가 먼저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차례대로 올라온다. 그 의견을 가지고 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토론을 한다”고 덧붙였다.
◇6시간30분 토론하기도…장시간 치열한 논쟁
헌법재판소의 평의는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닌 심도 있는 토론장이다. 김용준 전 소장은 “너무 많이 토론해서 자체적 결론을 수합하기가 어려울 정도”라며 “어느 날은 6시간 30분을 토론했다”고도 했다.
정경식 전 재판관은 “뭐 어떤 사건은 연구가 덜 된 것 같으면 대놓고 ‘연구를 더 시키자’, 그리고 뭐 ‘어떻게 하자’, 또 외국 판례가 필요하면 미국어학권하고 독일어학권 연구관들도 있고 하니까 (추가 연구를 요청했다)”라며 설명했다.
황도연 전 재판관은 평의 과정에서 의견 차이로 인한 갈등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황 전 재판관은 “제 기억으로는 어디까지나 토론은 토론이고 인간관계와는 구별했다고 생각한다. 반대의견을 낸 사람도 같이 이야기하고 술도 같이 먹기도 하고 그랬다. 그건 어디까지나 의견 차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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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역사적 판단
헌법재판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평의를 통해 결정을 내려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2·12 사건과 5·18 사건에 관한 평의다.
김진우 전 재판관은 “재직 중 12·12 사태, 5·18 사건 등 ‘사욕으로 쿠데타가 성공하여 집권한 경우 그가 실세하였을 때 내란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는가’가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됐다”며 “헌법재판소에서는 1995년 11월 23일 최종평의에서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돼야 한다는 위헌 결정 정족수를 초과한 헌법재판관님들의 찬성으로 평의가 열렸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선고 직전에 청구취하서가 제출돼 결정이 선고되지 못했다. 김 전 재판관은 “청구인들의 청구취하로 헌법소원 심판절차는 종료되었다고 같은 해 12월 15일 심판종료 선언을 선고한 바 있다”며 “당시 소수의견을 낸 바 있다. 주관적 문제에 대해서는 심판이 종료됐다고 하겠지만 중요한 헌법적 해명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선고를 해야 된다고 주장을 한 바 있다”고 밝혔다.
◇선배의 당부 “외부 압력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헌법재판소의 평의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지만, 때로는 평의 내용이 유출되는 사례도 있었다. 김용준 전 소장은 “평의의 비밀이 유지돼야 된다는 것은 선고하기 전에 새어 나가서 어떤 정치적인 이유나 어떤 영향을 받아서 그게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경우 예방하는 게 우선 주목적”이라고 설명했다.
황도연 전 재판관은 후배 헌법재판관들에게 “헌법재판소는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외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또 어떤 여론의 흐름이나 시류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건전한 상식과 양심에 터 잡아서 헌법에 맞게 헌법 합치적인 올바른 재판을 하는 기관이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광야에 우뚝 선 태산 같은 그런 헌법재판소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재판관 개개인이 어느 정도 지사적인 자세와 태도를 안 가지면 안 된다. 위험하다고 피해 버리고 변절해 버리면 올바른 재판이 되겠나”라고 반문했다.
지난해 6월 별세한 고중석 전 재판관은 “일반적으로 정치 상황이나 정치 논리보다는 제 근본 평의에 임하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헌법 해석이나 법률 이론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중점을 두고 사건에 임한 것”이라며 “우린 법률 하는 사람이니까 법률에 맞춰서 판단해야지, 다른 거 끌어다가 판단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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