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 "여자축구가 어려운데 1세대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난달 27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한강 둔치축구장에는 여학생 60명이 모였다. 모두 여자축구 선수들이었다.
우이초등학교 10명, 험멜WFC 15세 이하(U-15) 팀 24명에 동산고 소속 선수는 26명이었다.
우이초와 동산고는 서울에서 각각 초등, 고등부에서 유일하게 여자축구부를 운영하는 학교다.
한국 여자축구 간판 지소연(시애틀 레인)의 모교인 오주중이 2022년 여자축구부를 해산하면서 중등부에는 학교 팀이 없다. 현재는 험멜WFC와 같은 클럽팀이 서울 내 중학 팀의 명맥을 잇고 있다.
2019년 한양여대가 여자축구부를 해체한 이후 서울 내 대학팀은 없다.
사실상 서울에서 전문 여자축구선수로 생활하는 전체 인원이 한곳에 모인 셈이다.
이들이 동시에 둔치 축구장을 찾은 건 여자 실업축구 WK리그 서울시청의 유영실 감독에게 축구를 배우기 위해서다.
유 감독은 2003 미국 여자월드컵 당시 대표팀 주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선행을 이끈 여자축구 '레전드'다.
A매치 72경기에 출전하며 1993년부터 2008년까지 우리나라의 후방을 지켰던 유 감독은 '여자축구 1세대 선수'로 분류된다.
프로팀 차원에서 재능 기부 형식으로 특정 학교 축구부를 찾아가 축구교실을 진행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하지만 유 감독과 같은 지도자 한 명이 한 지역 내 전체 선수들을 상대로 교습에 나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유 감독은 지난달 28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선수나 지도자가 그라운드 안에만 갇혀서는 여자축구 발전이 어렵다는 판단에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유 감독은 "사실 지금까지는 (지도자로서) 내 코가 석 자였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만 생각했다"며 "하지만 실업팀을 이끄는 것도 6년 차가 되면서 (리그) 현장에서 할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잊고 살았던 거다. 내가 너무 좁게만 생각했다"며 "당장 연고지인 서울 지역을 돌아봤는데, 상황이 심각하더라. 이렇게라도 선수, 지도자분들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열악한 여자축구의 현실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었다는 유 감독은 태국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유소녀 선수들에게 적용할 훈련 프로그램을 데리고 있는 선수들과 함께 연구했다고 한다.
유 감독은 "우리가 돈은 많이 쓰지 못하지만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은 있지 않나"라며 "여자축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치 있는 훈련 세션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선수들과 마음을 모았다"고 말했다.
유 감독이 품은 여자축구 발전의 염원을 적극적으로 이뤄야 할 주체는 한국여자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다.
지난달 6일 새로운 수장으로 당선된 양명석 한국여자축구연맹 회장은 "유소녀들이 즐겁게 (축구에) 입문할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며 취임 일성을 밝혔다.
2월 26일 정몽규 회장의 연임이 확정된 대한축구협회도 여자축구를 포함해 축구 행정 각 분야를 담당할 새 집행부를 구성 중이다.
유 감독은 "최근 여자축구 발전을 위해 행정,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여자축구의 '품위'가 많이 떨어진 상황인 만큼 맡은 분들이 다 잘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pual0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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