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창문틈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대문을 박차고 나간다."
이런 속담이 있다. 약간 웃기지만 사실 투박한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다. 성장률 1%대는 많은 집의 창문틈을 벌려놓을 것이다. 그 틈으로 '가난'이라는 냉기가 들어오면 집안을 따뜻하게 해준 '사랑'은 대문을 박차고 나갈 것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25일 기준금리를 연 3.00%에서 2.75%로 인하했다. 한은은 올해 한국경제 성장률 전망을 1.5% 수준으로 크게 낮춘 뒤 경기진작을 위해 금리인하가 불가피했음을 강조했다.
한은의 전망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11일 내놓은 전망치 1.6%보다 더 낮은 수준이다.
이에 앞서 영국 캐피털이코노믹스(CE)는 지난 19일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1%에서 1.0%로 하향 조정해 충격을 준 바 있다. 말이 1%이지 상황에 따라서는 0%대 진입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다름아니다. 이른바 '제로성장'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처음 추가경정예산(추경)규모를 추정할 때는 성장률 전망이 대부분 2%대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려가고 있으니 정말 상반기를 마감할 즈음에는 어느 수준까지 성장률 전망이 낮아질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트럼프발 관세충격은 그 어느 전문가나 기관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가난이 창문 틈에 끼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문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바람을 일으킬지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1.5%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외환위기, 코로나 위기 등 아주 극심한 불황 국면 외에는 겪은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2023년 1.4%, 2024년 2%에 이어 올해도 1.5%이고 만약 내년도 한은은 1.8%로 예상한다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다시 1.4%대로 떨어질 것으로 우려했는데 1.5% 밑의 성장률이 한해 건너 뛰고 세 번씩이나 이어진다면 이제부터 한국경제는 1.5% 밑의 성장이 사실상 뉴노멀이라고 규정해도 이상할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정쟁 속에서 길을 잃은 추경 논의, 경기진작의 마중물이 될지도 불투명
이창용 한은 총재는 평소 추경을 15조~20조원 규모로 편성해 성장률을 0.2%포인트(p) 정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 총재는 "20조원 이상 규모로 추경을 집행하면 부작용이 크다"며 "진통제를 갖고 전처럼 훨훨 날게 하는 것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장기 재정건전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추경에 대한 이 총재의 이같은 가이드라인은 더불어민주당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3일 35조원 규모의 추경편성을 주장하고 재원으로 우선 지출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할 것이지만 부족할 경우 적자국채 발행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 진성준 정책위의장은 "재작년, 작년 계속해서 세수 결손이 발생했는데, 정부가 지출하지 않은 예산 규모도 30조원 이상 된다"면서 우선적으로 지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전제를 깔았다. 그는 이어 "그럼에도 부족한 게 있다면 국채 발행을 결심해야 한다. 국채 발행을 너무 우려할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 경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국채를 통해서라도 일단 경기를 방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창용 총재가 언급한 추경 마지노선 20조원과는 큰 차이가 난다.
국민의힘은 일단 민주당이 주장하는 35조원 규모의 추경에는 즉각 반발했는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을 76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이들을 위해 1인당 100만 원 규모를 바우처 형식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른바 맞춤형 지원인 셈이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연매출 1억400만원 이하 소상공인이 전국에 760만명 정도 되는 것 같아 바우처 예산을 지원할까 한다. 보험금, 판촉비 등도 포함해 1인당 100만원을 지원하는 게 맞지 않겠나 하고 협의 중이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3월 중에 여야가 추경에 합의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룰 경우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되면 정치권은 즉각 대선 국면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추경 편성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도 정치권이 큰 혼란에 빠져들어갈 것이 분명해 여야정협의체가 추경 규모를 정확하게 추정하고 집행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여야 모두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만 치지 실질적인 대응 능력을 상실한 채 상반기를 끝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한국경제 성장률이 1%밑으로 내려가 0에 수렴될 수도 있음이다.
◇정치격변 이후 대규모 부양책 불가피해질 듯, 금리인하는 물론 재정정책 총동원령까지
이창용 한은 총재는 추경을 15조~20조원 규모로 편성하면 성장률을 0.2%포인트가량 높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20조원 정도면 적자 국채까지 동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은이 금리를 0.25%포인트 내리면 성장률을 0.07%포인트 올리는 효과를 내는 것으로 분석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추경이 훨씬 경기진작에 효과가 있음을 알수 있다.
어쨌든 한은의 전망처럼 우리 경제가 1.5% 성장에서 추경을 통해 1.7%까지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 총재는 내년도 우리 경제 성장률 전망을 1.8%로 제시하면서 "이제 그 정도 성장률은 (신성장산업을 일으키는) 구조조정을 하지 못한 우리 경제의 한계"라는 시각을 보였다. 내년 성장률 전망 1.8% 역시 트럼프발 관세전쟁의 여파에 따라 언제든지 1.4% 수준으로 재조정될 수 있음도 분명하게 밝혔다.
문제는 성장률 1%까지 무너져 0으로 수렴하는 사태이다. 지금 국내외 상황이 만만치 않아 코로나 시국에 버금가는 위기국면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경제가 상반기중 뚜렷한 반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하반기에 접어들게 되면 어차피 새로운 정치질서 속에서 집권의 키를 누가 쥐던 대규모 부양책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그것은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어느 편이 되든지간에 집권세력이 명분을 쥐고 줄줄이 이어지는 지자체 선거, 총선 등 정치일정을 유리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도 경기진작은 불가피한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속담처럼 '가난이 창문틈으로 들어오면 (집권당에 대한) 국민의 사랑이 대문으로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자영업자 500명을 대상으로 2024년 실적 및 2025년 전망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난해 매출은 평균 12.8% 감소했고 순이익 역시 13.3% 줄어들었다고 25일 밝혔다.
내수에 의존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사정은 올해는 보나마나 더욱 악화되고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GDP에서 15% 정도를 차지하는 건설투자가 올 상반기 전년 동기 대비 6.7%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건설투자 역시 내수의 중요 부분인데 수출전선에 비상등이 켜진 상태에서 내수 시장은 좀처럼 동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쯤되면 적자국채는 고사하고 아예 돈을 찍어내는 '부채의 화폐화' 유혹에 정치권이 빠질 수도 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2021년쯤에 홍콩계 증권사 CLSA 폴 최 서울지점 리서치센터장 등은 '이재명은 누구인가'(Jae-myung who?)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만약 이재명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장기적으로 '부채의 화폐화'(public debt monetisation)를 시도하면서 증시에 단기 부양 효과를 낼 것이라고 진단했다.
'부채의 화폐화'는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사들여 그만큼 시중에 화폐를 찍어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가장 큰 부작용으로는 인플레이션을 들 수 있다.
CLSA는 "보편적 기본소득과 복지지출 확대를 지지해온 그(이재명)의 정치적 행보를 되집어 보면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부 역할 확대와 정부의 씀씀이 확대를 줄기차게 주장했다"면서 이같은 논리를 뒷받침했다.
대선 운동기간 중 논란이 커졌지만 이재명 당시 후보가 "한국도 기축통화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을 보면 CLSA의 분석이 전혀 엉뚱한 내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부채의 화폐화'는 어느 정부나 중앙은행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코로나 시국이 한참이었던 20년에 한국은행이 국고채 추가매입을 추진하자 당시 보수 야당에서는 발권력을 동원하는 '부채의 화폐화'를 지적했고 이주열 당시 한은 총재가 한발 물러선 적도 있다.
이주열 총재가 국감장에서 "재정 건전성 저하가 우려스럽기 때문에 위기가 극복되면 엄격한 재정준칙이 필요하다"고 강조, 야당의 주장에 동조하는듯한 발언을 하자 집권 민주당이 발끈했다.
심지어 양경숙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너나 잘하세요'라는 유행어가 생각난다"고 말해 이게 일부 기사에 헤드라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재정완화 정책이 민주당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 시절 총선을 앞두고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이른바 '한국형 양적 완화'를 들고나와 큰 논란이 전개되기도 했다.
당시 강봉균 위원장은 한국은행이 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산금채)과 주택담보대출증권(MBS)을 직접 매입하는 식으로 돈을 풀자고 주장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개인부채를 장기화하고 당시 위기에 빠진 조선, 해운업계를 위해 돈을 무한정 풀자는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 역시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방만 재정을 비난해왔지만 윤석열 정부 3년차를 문재인 정부의 3년차와 단순 비교하면 윤 정부의 적자국채 증가폭이 전 정부의 1.5배에 달한다는 주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정준칙만을 외치는 것은 선거에 명운이 좌우되는 정치인들에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동력을 상실한 한국경제가 0%에서 1% 언저리에서 성장률이 정체된다면 대규모 적자 국채 발행이든 '부채의 화폐화'든 아니면 '강봉균식 양적완화'이든 어느 선택이라도 가능해지는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이재명 대표가 내세우는 '기본사회'나 국민의힘에서 주장하는 '시장친화적 성장', 이창용 한은 총재가 주장하는 구조조정이나 지금 한국경제가 처한 상황에서는 대규모 마중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차피 재정정책을 동원하지 않으면 힘든 정책들이다. 때문에 돈을 풀더라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지 그런 부분에 논의가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이 모든 이슈들이 정치혼돈이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고 있지만.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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