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추월당한 가운데,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 수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에서 유출된 기술이 중국 반도체 성장의 밑거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술 유출범들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해외에서는 국가 핵심 기술을 빼돌린 유출범들에게 '간첩법'을 적용해 무기징역이나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야당의 반대로 관련 법 개정이 표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술 유출에 대한 엄벌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23일 발표한 '3대 게임체인저 분야 기술수준 심층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기술 수준은 주요 분야에서 중국보다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전문가 39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조사 결과, 지난해 기준 한국의 반도체 분야 기술 기초역량은 최고 기술 선도국(100%) 대비 모든 영역에서 중국보다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고집적·저항기반 메모리 기술의 경우 한국은 90.9%를 기록해 중국(94.1%)보다 낮은 2위를 차지했다. 고성능·저전력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술도 한국(84.1%)이 중국(88.3%)에 뒤처졌으며, 전력반도체(한국 67.5%, 중국 79.8%), 차세대 고성능 센싱 기술(한국 81.3%, 중국 83.9%)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도체 첨단 패키징 기술은 양국이 74.2%로 동일하게 평가됐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결과다. 업계에서는 중국 반도체 기술의 급성장 원인으로 한국의 기술 유출 문제를 지목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건수는 △2019년 14건 △2020년 17건 △2021년 22건 △2022년 20건 △2023년 23건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5년간 누적된 해외 기술 유출 건수는 총 111건, 이로 인한 피해 규모는 23조원에 달한다. 특히 반도체 관련 기술 유출이 43건으로 가장 많았다.
반도체부터 가전·AI·조선까지…솜방망이 처벌, 기술 유출 범죄 속수무책
국내에서 기술 유출 범죄가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미약한 처벌 수위가 꼽힌다. 해외 주요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기술 유출범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에서는 핵심 기술을 유출한 경우 무기징역·사형까지 가능하다. 반면 한국은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라 최대 징역 18년, 벌금 65억원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가벼운 처벌에 그친다.
실제 사례를 보면, 최근 법원은 삼성전자 협력업체의 전직 직원이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사건에서 징역 7년과 벌금 2억원을 선고했다. 국내 판결 중에서는 비교적 강한 처벌이었지만, 이는 10년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141건 중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단 14건(9.9%)에 불과한 현실을 감안하면 여전히 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서 해외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이 낮은 이유는 '간첩법' 적용 범위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간첩법은 적용 대상을 '적국'으로 한정하고 있다. 즉, 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적국은 북한뿐이다. 하지만 국내 기술 유출의 70%를 차지하는 중국은 적국이 아니므로 간첩법을 적용할 수 없다.
반면 미국, 중국, 일본 등은 기술 유출을 간첩죄로 규정해 엄벌하고 있다. 미국은 1996년 '경제스파이법'을 제정해 국가 핵심 기술 유출을 간첩죄로 처벌한다. 최고 징역 30년 이상 가중처벌이 가능하며,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경우 간첩법(Espionage Act)에 따라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중국 역시 지난해 해외 기술 유출에 대해 간첩법을 적용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중국의 간첩법은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일본도 방산, AI, 반도체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기술을 유출할 경우 간첩죄를 적용해 최대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한국에서는 간첩법 적용 범위를 '적국'에서 '해외'로 확대하는 개정안이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뒤, 야당의 반대로 표류 중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정부와 여당은 간첩법 개정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고, 지난해 11월이 되어서야 법사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면서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가 태도를 바꾸면서 법사위 전체회의 상정이 미뤄지고 있다"며 입법 지연을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간첩법 적용 범위를 확대해 기술 유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기술 유출로 인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며 "기술 유출로 얻는 이득이 처벌보다 크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간첩법이 적용되면 처벌 수위를 높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될 것이다"고 개정안 통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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