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은 사석에서 곧잘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통령이 먼저 받나 내가 먼저 받나 두고 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을 들고 나왔다. 결국 두 사람은 대북사업의 최대 경쟁자였다.
대통령과 사업가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은 노벨평화상을 두고 경쟁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1997년 말부터 이미 대북사업을 위한 물밑 접촉이 봇물이 터지듯 했다.
한편으로 정몽구 회장은 북한 측과 빠르게 사업을 진척시켰다. 화차 임가공 및 북한 내 컨테이너 독점 공급 계약을 했다. 또 선박 수리 사업 및 고선박 해체 사업 의향서도 체결했다. 그러나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한 정주영 회장은 정몽헌 회장에게 대북사업을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1998년 1월 13일, 현대그룹은 깜짝 인사를 단행했다. 정주영 회장은 정몽헌 회장을 부회장에서 현대그룹 공동 회장으로 임명했다. 반면 정몽구 회장은 단독 회장에서 공동 회장이 되었다. 대북사업이 정몽헌 회장을 현대그룹의 후계자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현대그룹의 형제간 공동 회장 체제는 국내 대기업에서 처음일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현대그룹 측은 ‘국내 사업은 정몽구 회장, 해외사업은 정몽헌 회장이 나눠서 한다는 체제로 이해해달라’며 역할 분담론을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해외사업이란 바로 대북사업을 일컫는다.
정몽헌 회장이 열 살 위 형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일등 공신은 역시 이익치 회장이었다.
정몽헌 회장은 아버지 큰 그림을 먼저 읽었다. 정주영 회장은 중동 건설로 국가를 살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 현대그룹이 중동 건설로 달러를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이후 중동 건설 붐이 사라지면서 건설 중장비가 놀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사업 감각으로 대북사업에 눈을 돌렸다. 중동 건설같이 대북사업 붐을일으켜 북한 건설로 현대그룹의 영광을 되찾자는 꿈이다. 단순히 현대건설의 노는 장비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명예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50년을 내다보는 비전이었다. 대북사업이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정몽구 회장이 추진했던 화차 임가공 사업에 실망한 것은 당연했다.
첫 대북사업으로 최소한 평양에서 신의주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북한의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구상했다. 금강산 관광사업 추진도 그런 차원이었다.
정몽헌 회장, 이익치 회장, 김윤규 사장 등은 처음부터 이 같은 정주영 회장의 마음을 읽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 세 사람은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고 다니는 실없는 사람들'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정몽헌 회장은 현대그룹을 맡은 뒤로는 숲을 보는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 현대그룹 총수로서 향후 50년을 내다본 대북사업으로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한 겨울, 눈이 많이 왔던 날 정주영 회장은 술에 취해 귀가했다. 새벽 1시쯤 청운동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 앞에서 운전기사를 보내고 계단에 막 올라서는 순간 비틀거리면서 넘어졌다. 계단에 눈이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은 추운 날씨에 10여 분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가족들이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겼으나 다리에 큰 골절상을 입었다. 노인이라 치명적이었다. 이때부터 정주영 회장의 눈빛이 초점을 잃기 시작했다.
장례식 날, 청운동 언덕에서 명예회장의 운구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20여 분간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명예회장의 여동생인 정희영 씨의 곡소리가 유난히 컸다.
"아이구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쩌나, 대통령도 한 번 못 해보고.”
한편 명예회장의 부인인 변중석 여사는 남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투병 중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1990년부터 중앙병원에 입원하며 투병 중이었다.
건강하던 변 여사는 맞아들 몽필 씨가 198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 충격으로 건강을 잃고 말았다. 1990년에는 4남인 몽우 씨마저 자살로 생을 마치자 더는 버틸 힘을 잃었는지 이듬해 병원에 입원해 임종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5남인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마저 대북사업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으니 변 여사는 생전에 3명의 자식을 먼저 보낸 불행한 어머니였다.
말년에는 거의 의식이 없어 남편 정주영 회장과 아들 정몽헌 회장의 사망 사실도 몰랐다.
환하게 웃는 얼굴인 정주영 회장의 영정은 흰색 국화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옆으로 김대중 대통령, 최규하,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 이한동 국무총리,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김중권 새천년민주당 대표, 김중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화환이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빈소에는 정몽구(현대자동차 회장), 정몽근(금강개발산업 회장), 정몽헌(현대아산 이사회장), 정몽준(국회의원), 정몽윤(현대해상화재 고문), 정몽일(현대기업금융 회장) 6형제가 모두 나와 조문객들을 맞고 있다.
헌화를 하고 나가는 조문객들을 주로 장남인 정몽구 회장과 넷째 아들인 정몽준 의원이 배웅했으며, 정몽헌 회장은 거의 빈소만 지켰다.
정주영 회장은 자신과 현대 그리고 평화통일의 미래를 함께 그려 나갔었다. 김시래 기자는 이런 장대한 스케일의 기업인은 앞으로도 흔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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