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이정환 기자] 서울대학교 화학부 이동환 교수 연구진은 분자 클립을 이용해 생명체의 단일 카이랄성 기원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분자가 ‘상호 견제(mutual antagonism)’ 특성을 가지도록 레고 블록처럼 3차원 요철 구조를 갖게 설계해 미세한 비대칭성을 단일 손대칭성으로 증폭시키는 메커니즘을 구현하고 이를 3차원 구조 분석을 통해 확인했다. 분자 간 상호작용에서 높은 선택성을 구현하고 명확한 구조적 증거를 제시한 이 연구는 영국 왕립화학회(Royal Society of Chemistry, RSC)에서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 〈Chemical Science〉에 발표됐으며, 이 주의 논문(Pick of the Week)으로 선정됐다.
왼손과 오른손은 구조는 같아 보이지만, 어떤 방향으로 돌려도 서로 포갤 수 없다. 서로 겹칠 수 없는 거울상이라는 뜻인 카이랄성을 손대칭성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이러한 카이랄성은 지구상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대부분 분자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아미노산은 대부분 ‘왼손잡이’ 구조만을 가지며, DNA 이중나선은 오직 오른나선 구조만 존재한다. 이러한 비대칭성을 단일 카이랄성(homochirality; 단일 손대칭성)이라고 부른다. 지구에서 이러한 단일 카이랄성이 어떻게 시작되어 모든 생명체로 퍼져나갔는지는 풀리지 않은 문제이며, 우주의 기원만큼이나 흥미로운 과학적 질문으로 남아 있다.
단일 카이랄성의 기원에 대한 대표적인 가설 중 하나는 ‘상호 견제(mutual antagonism)’ 이론이다. 이 이론은 생명체가 태동하기 이전,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분자가 동일한 비율로 존재했지만, 미세한 요인으로 한쪽이 약간 더 많아졌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100개의 분자가 왼손잡이 분자 51개, 오른손잡이 분자 49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작은 차이만으로는 단일 카이랄성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분자가 서로 강하게 결합해서 안정한 49개의 깍지쌍을 형성하고, 이로 인해 오른손잡이 분자가 모두 사라진다면, 남아 있는 2개의 왼손잡이 분자는 단일 카이랄성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이 남은 왼손잡이 분자들이 다른 분자들과 상호작용해서 비대칭성이 증폭되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단일 카이랄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이 가설의 핵심이다.
이동환 교수 연구진은 이러한 상호 견제 원리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분자 클립’을 개발했다. 한글 'ㄷ'(디귿)자 형태의 이 클립 모양 분자는 두 개가 깍지 낀 모양으로 결합하여 하나처럼 거동하는 흥미로운 3차원 구조를 이룬다. 연구진이 개발한 분자 클립은 서로 다른 카이랄성을 가진 클립끼리 (마치 왼손과 오른손을 깍지 낀 것처럼) 매우 강하게 결합하는 반면, 같은 카이랄성 클립끼리는 매우 약하게 결합한다. 숫자로 비교하면 무려 180배에 달하는 이러한 높은 입체 선택성은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분자 시스템보다 크다. 이러한 높은 선택성은 분자 클립의 정교한 설계에서 비롯된다. 클립 구조는 레고 블록처럼 요철 구조를 가지며, 들어간 부분에는 수소결합 주개를, 튀어나온 부분에는 수소결합 받개를 배치했다. 그 결과,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클립의 요철은 정확히 상보적이어서 강한 수소결합을 형성하지만, 같은 손잡이 클립끼리는 요철이 맞지 않아 결합 세기가 약하다. 이러한 분자 설계를 통해 상호 견제 가설의 중요한 전제 조건인 ‘반대 카이랄성 사이의 강한 결합’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분자 클립을 이용하면 작은 비대칭성을 큰 비대칭성으로 증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왼손잡이 클립과 오른손잡이 클립을 60:40으로 섞으면, 오른손잡이 클립 대부분이 왼손잡이 클립과 깍지쌍을 형성해 더는 다른 분자와 상호작용할 수 없게 된다. 깍지쌍을 만들지 않는 클립 중에서 왼손잡이 클립과 오른손잡이 클립의 비율은 99.5:0.5로, 단일 카이랄성에 근접한 수준(99%)으로 크게 증폭된다. 그리고, 이 클립들이 다른 분자들과 상호작용하여 왼손잡이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비대칭적 입체 정보의 확산이 시작된다. 만약 초기 비율이 왼손잡이 클립 40%, 오른손잡이 클립 60%였다면, 절반을 조금 넘던 오른손잡이 정보가 99%에 달하는 높은 선택성으로 다른 분자로 확산됐을 것이다.
이동환 교수 연구진은 초분자화학의 다양한 실험 방법과 모델링 기법을 이용해 입체 선택적 분자 간 상호작용을 확인했다. 특히, 거울상 분자 사이의 깍지 결합과 분자 클립이 다른 분자에 카이랄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을 3차원 구조 정보로 규명한 최초의 사례이다. 지구상 생명체의 단일 카이랄성을 설명하는 상호 견제 가설은 그동안 촉매 반응에서 파생된 간접적 증거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상호작용의 순간을 구조적으로 캡처해서 명확하고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차별성과 중요성이 있다.
이번 연구는 생명체의 단일 카이랄성 기원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며, 현재까지 보고된 시스템 중 가장 높은 입체 선택성을 통해 상호 견제 가설의 타당성을 뒷받침했다. 이동환 교수는 “분자 설계를 통해 궁금증을 해결하고 질문에 답하는 것이 화학자의 역할”이라며, “이번 연구가 단일 카이랄성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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