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직업에 대한 과한 환상, 의미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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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직업에 대한 과한 환상, 의미부여

시보드 2025-01-16 07:30:01 신고

한국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직업이라는 것에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만 행복하다던가,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던가,
'꿈'이라는 단어를 '진로'나 '장래희망'과 동일시 하는 등의 사고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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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진로 교육에 나오는 직업군들은 다 뭔가 개성이나 특색이 있고, 유니폼이나 들고 있는 도구 같은 걸로 확실히 표현이 되는 그런 직업들,
예를 들어 의사, 판사, 요리사, 파일럿, 간호사, 警察, 운동선수, 예술가, 가수, 은행원, 엔지니어, 과학자, 교사 등이지, 그냥 별 특색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나 평범한 수리 기사 등은 나오는 경우가 없다
"그냥 월급받는 회사원이 장래희망이예요"라고 하면 "시시한 놈, 넌 꿈도 없냐"는 소리 듣기 일수다

각종 직업군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늘 해당 업계 탑급의 실력을 갖고 있고 마치 그 직업이 자신의 전부인냥, 천직인냥, 열정과 프로의식으로 가득 찬 멋진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이렇게 직업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진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일 업으로 삼으면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이 많을 거다
(좋아하는 일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지만)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으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만으로 자신이 대변되는 그런 특색있는 일을 할 수 없다
절대적 다수의 사람들은 멋지고 극적이고 흥분되고 짜릿하고 그 일을 통해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고 무난하고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프로의식이나 열정 같은 것도 크게 필요 없는 그런 지루하고 미지근한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다
(물론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맡아서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은 가져야겠지만 그건 다른 얘기다)

하지만 이게 정녕 나쁜 것일까?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는 삶은 불행하고 실패한 삶인가?
모두가 직업이나 유니폼으로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그러지 못한 사람은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인가?
직업 그거 그냥 대충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일,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일로 골라서 주어진 일만 하고 퇴근하는 게 꿈도 열정도 패기도 없는 지루하고 한심한 삶이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멋진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정신승리나 합리화에 불과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직업 활동은 생계 유지를 위해 해야 하는 경제 활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저런 것들을 다 걷어내고 본질만 본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직업이란 것에 대해 상술했듯이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게 된 것일까?
왜 중고등학교 진로 시간 때부터 돈을 잘 벌거나, 명예가 있거나, 뭔가 화려하고 특색 있는 일을 장래희망으로 적어 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 인생에 대해 성의 없거나 진지하지 않은 학생 취급을 받아야 했던 걸까?


난 이것이 크게 두 가지 이유, 한국의 열악한 근로 환경과, 낮은 자존감과 자아정체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한국은 근로 환경이 열악하다
일단 근로 시간부터가 세계 탑 수준인데 그에 비해 노동 생산성은 최하위라는 통계는 유명하다
비한국 같았으면 두세명이 맡아서 처리할 업무량을 한국에서는 인건비 이슈로 한명이 처리해야 하고,
빠르게 잘 처리해 내는 사람에게는 일을 더 몰아준다
그러니 적당히 눈치 보며 속도 맞춰서 일하자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고 효율성과 생산성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군대만 하더라도 "잘하지 말고 적당히 하라"라는 게 조언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잠깐 강제징용이나 남성착취 등과 분리해서 생각하면 이는 말이 안 되는 조언인 게, 군대에서 하는 일은 나와 전우들의 생명, 나라의 안보가 걸려 있는 매우 중요하고 무거운 일들이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는 것이 맞고, 또 국가나 사회에서 최대한 그렇게 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어야 했다)

직업군을 막론하고 노동 시간은 길고, 노동 강도도 높고,
긍지나 보람도 딱히 못느끼겠고, 직장에 있는 인간이나 고객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도 큰데
급여는 노동강도에 한참 못미치는 게 한국의 대부분의 직업들의 사정이다
집은 그냥 씻고 몸 누이는 곳이고 아침 일찍 만원 전철이나 교통 체증에 시달리며 출근하면 또 같은 놈들, 같은 일들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게 한 달을 꾸역꾸역 버티면 세금 떼고 들어오는 돈은 이래 저래 한 달 살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마음 먹고 아껴쓰지 않으면 모을 수도 없고, 모아서 뭘 하려해도 물가나 부동산이나 터무니 없이 비싸다
그러니 하는 일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 관심있는 일, 혹은 남들이 보기에 멋있는 일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근로에 의해 받는 스트레스 대비 근로의 대가가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근로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조금이라도 할 만 한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어도 상명하복식의 조직문화 때문에 자아실현 같은 건 꿈 속의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근로 시간이 길기 때문에 좋든 싫든 직업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수면 8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6시간 중 10시간 이상이 직업 활동에 소모된다면 삶에서 직업이 갖는 중요도나 무게가 클 수밖에 없다
이건 개인의 가치관 같은 걸 떠나서 인생이라는 유한한 시간 동안 직업이 차지하는 시간적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많은 한국인들을 관찰해온 바 한국인은 자존감이 낮고 자아정체성이 뚜렷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는 상술한 근로 시간과도 이어지는 부분인데, 근로 시간이 길다보니 일상에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스포츠를 즐기거나 악기를 배우는 등 취미를 파고 들 시간이 전혀 없다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확실히 구분해줄 수 있는 나만의 세계를 구축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거의 전무한 것이다
또 한국 특유의 교육 방식은 그럴 수 있는 토양 자체를 어린 시절부터 제거해버린다
따라서 자신의 직업, 자신이 입는 유니폼과 명함, 직함 등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구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매년 롤 티어마냥 직업 티어를 갱신해서 올리는 블라인드를 떠올려 보면 된다
블라인드는 기본적으로 익명이면서 직업이나 회사이름만 공개되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직업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환경에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방식,
그것이 블라인드에서 볼 수 있는 풍경 그 자체이다


즉 한국에서는 개인이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 자존감을 높이고 타인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에 근로 시간은 길고 노동 강도도 높다
서열질 하기 좋아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미디어에서는 이것을 부추기는 문화까지 있다
따라서 직업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근로 시간도 적당하고 노동 강도도 낮으며 소득도 적당해서 여가를 즐기며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어린 시절부터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하며
(따라서 당연히 타인의 개성과 취향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지고)
정답을 찾기보다 자신만의 생각을 정립하는 것을 중요하게 싱각하고
부활동이나 취미 동아리 등이 권장되는 교육을 받았다면,
과연 직업에 이렇게까지 의미부여를 했을까?

그냥 월급 받는 월급쟁이 회사원이 뭐가 어떤가?
기름때 묻은 옷 입고 기계 만지고 고치는 수리 기사가 뭐가 어떤가?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뭐가 어떤가?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 주고 떳떳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할 수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 일들이 창피한 것도 아닐뿐더러,
나 자신이나 타인을 반드시 직업인으로서의 나, 직장에 있는 나로서 마주해야 할 이유도 없다
유니폼을 벗고 퇴근하면 거기엔 이 우주에서 유일한 나라는 존재가 있는데 왜 직업으로만 자신의 삶이 표현돼야 하는가?
퇴근하고 나만의 세계에 들어가면 되지 않은가?
남들이 나만의 세계를 인정해준다면 더욱 즐겁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즐겁고 재밌을 수 있는 세계인데 뭐가 문제인가?

예를 들어 작곡이 취미라면 곡을 써서 유튜브에 올렸을 때 사람들 반응이 좋아도 기쁘겠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머리 싸매고 건반 두드리며 곡 쓰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은가?
직업도 아니고 취미이니 경쟁할 필요도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다
음으로 선율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면 그 뿐이다
어떻게 해야 이 감성을 소리로 포착할 수 있을까, 어떤 효과를 줘야 할까, 영화에 삽입된 곡의 이 부분을 다르게 바꾸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여러 음악을 들어보며 연구도 하고 책 보고 공부도 하고
그것도 멋지고 진지하고 행복하고 열정적인 충만한 삶 아닌가?
그리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굳이 자아정체성을 직업 같은 것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사람은 적당한 노동 강도와 급여, 워라밸이 보장되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크게 상관 없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한국에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한국에서는 개성이 강하고 희한한 별종 취급이고
어쩌면 부모 자식 연을 끊어야 가능한 삶일지도 모르겠으나 비한국에서는 이게 그냥 평범한 사람의 삶이다
얼마나 행복한가

비한국에서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되어 남들 앞에 나서야 하는 경우는
자식이 있는 경우 학교에서 하는 학부모 직업 특강에 초청 받았을 때 정도 뿐이다

(물론 비한국에서도 의사라고 하면 여자들한테 인기 많고, 派遣직은 무시하거나 깔보는 경우도 있지만 비한국에서 이런 것은 무례한 것인 반면 한국에서는 이런 사고방식이 거의 상식이고 문화다
비한국에서도 점수를 0.1점 단위로 매겨 놓은 "공기업 티어표"가 유행하는지 생각해보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학창 시절 진로교육은 근본적인 방향부터가 글러먹었다
많은 이들이 진로 시간에 원하는 직업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는데, 어쨌든 뭔가 조사해서 써내라고 하니 그럴 듯한 직업 하나 골라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서 억지로 빈 칸 채워 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 낭비를 했던 경험이 있을 거다
한국 교육을 받은 중고등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이 없거나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일단 자아를 제대로 형성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진로 같은 건 그 다음의 문제인데,
교육의 목표 자체가
'패스트 팔로워식의 산업에 톱니바퀴 역할을 할, 말 잘 듣고 머리 잘 돌아가고 센스 있는 인재(노예) 효율적으로 대량 생산 하기'
이니 개인이 행복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의 직업관이 뒤틀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취업난, 인력난, 근로환경, 교육, 산업구조 전부 다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엮여 있는 문제고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답이 없다
수술하기 어렵게 마구 꼬여있는 종양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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