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고영미 기자]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의 방어권 보장을 골자로 하는 안건을 상정해 논의하려던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전원위원회가 직원과 시민사회단체 등의 반발로 파행됐다.
인권위가 12·3 비상계엄의 위헌·불법성을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정작 수사와 탄핵심판을 거부하고 있는 윤 대통령의 ‘방어권’을 촉구하며 사실상 계엄을 두둔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인권위원들 “계엄 선포, 대통령의 고유 권한”
지난 13일 인권위는 2025년 제1차 전원위를 열고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 위기 극복 대책 권고’ 안건을 비공개로 논의해 의결할 예정이었다.
해당 안건은 김용원 상임위원과 한석훈·김종민·이한별·강정혜 위원 등 인권위원 5명이 제출한 것으로 헌법재판소 등 사법부와 수사기관에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건의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할 것’ ‘윤 대통령을 불구속 수사할 것’ 등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들은 안건 상정 배경으로 “계엄 선포는 대통령에게 부여한 고유 권한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등 계엄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인권위 직원들과 시민단체가 안 위원장과 안건을 발의한 김용원 상임위원 등을 막아서면서 회의가 무산됐다. 인권위 전원위 개최가 정족수 미달로 취소된 적은 있지만, 물리적 저지로 취소된 것은 처음이다.
인권위 14층 전원위 회의실 앞을 가득 채운 이들은 '반인권 비상계엄 동조 안창호 사퇴하라'는 등의 팻말을 들고 안 위원장과 안건 발의자 김용원 상임위원의 사퇴를 요구했다.
회의 시간에 맞춰 도착한 안 위원장은 결국 회의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위원장실로 복귀했고, 김용원 상임위원과 강정혜·이한별·한석훈 위원 등 안건에 이름을 올린 이들도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위원장실로 돌아간 안 위원장은 인권위원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오는 20일 전원위를 다시 열기로 했다.
시민단체‧직원들 “안창호 사퇴해야”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 등 시민단체는 “반인권적이고 무책임한 위원장과 인권위원들로 인해 이미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래도 시민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마지막 보루라고 믿었던 인권위가 이 지경까지 무너진 것에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며 “시민의 인권을 짓밟은 이들을 옹호하는 것도 시민의 인권을 짓밟는 일이다. 인권을 짓밟는 내란 세력을 옹호하는 안건이 상정되고 의결된다면 인권위는 그 존재 의미가 없어진다”고 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은 지난 13일 인권위 앞 기자회견에서 “12·3 비상계엄 사태로 국민의 인권이 침해되는 중대한 상황에서 한 달여 동안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던 인권위가 오히려 내란 주범들을 두둔하는 권고를 결정하려 하고 있다”면서 안창호 인권위원장 등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러면서 “(논란이 된) 안건의 내용은 한 마디로 윤석열 측 변호인의 변론을 복사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면서 “안 위원장과 5인의 위원들은 차라리 윤석열 측 변호인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촉구했다.
문정호 전공노 인권위 지부장도 “위원 5명이 안건을 제출한 지난 10일 우리 소중한 동료 1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라며 “부끄러움과 분노, 참담함을 왜 안건을 발의한 위원들이 아닌 우리 직원들이 감당을 해야 하는 거냐”고 비판했다.
인권위 내부 반발도 거세다. 인권위 과장급 직원들도 긴급성명을 내고 “인권위 간부로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며 “일부 위원들이 위원회 모두를 ‘내란 공범’으로 내모는 사태를 좌시할 것이냐, 이제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힘을 보탤 것이냐 결정해야 한다”라고 했다.
또한 취임 전 ‘차별금지법을 도입하면 에이즈 등 질병이 확산한다’ 등의 발언으로 차별·혐오 논란을 빚어 온 안 위원장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앞서 안 위원장 주재로 열린 지난달 전원위에서는 ‘비상계엄 선포에 관한 직권조사 건’이 기각되기도 했다.
이에 인권위 간부급 직원들은 “인권위 구성원 모두를 ‘내란공범’으로 내모는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라며 긴급 성명문을 냈다.
헌법학자들도 이날 안건 상정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인권위에 제출했다. 헌법학자 100여명으로 구성된 ‘헌정회복을 위한 헌법학자회의’는 인권위 안건 내용 중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절차의 정지를 검토할 것’, ‘체포 및 구속된 피의자들에 대해 불구속 재판과 수사를 할 것’이라는 권고에 대해 “인권 관련성이 없고 헌재와 법원, 수사기관의 고유 권한”이라고 일축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소추 철회 권고에 대해선 “탄핵소추권을 국회에 부여한 헌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野 “안건 철회 않을 시 법적 책임 물을 것”
국회 운영위 소속 박성준·고민정·서미화·정진욱·전용기(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신장식(조국혁신당) 의원, 천하람(개혁신당) 의원은 지난 13일 오후 2시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창호 위원장과 ‘내란 비호 안건’을 발의한 5인 위원으로 인해 인권위가 반인권·반민주·반헌법 위원회가 됐다”며 “인권위를 망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들은 인권위원장실을 찾아 안 위원장에게 안건 철회를 요구했으나 “잘 논의해서 좋은 결론을 내도록 하겠다”는 원칙적인 답변만 들었다.
고민정·서미화·신장식 의원은 이날 전원위가 무산되자 기자들과 만나 “오늘은 인권위 설립 이래 가장 치욕스럽고 분노스러운 날”이라며 “문제의 안건은 허위사실로 가득 차 있다. 5인 위원 중 안건을 철회하지 않는 위원들은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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