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수사관에게 물고문을 받던 박종철은 당시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87년 1월13일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된 그는 심문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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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왜 박종철을 연행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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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대학 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 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된 박종운을 잡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했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다. 그러나 박종철은 대답하지 않았고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박종철은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숨졌다. 이날 밤 11시45분쯤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현장에 도착해 검진했을 당시 그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경찰은 이날 밤에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화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최환 부장검사는 사체 보존 명령을 내렸고 사건 지휘는 그날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사건 다음날인 1987년 1월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됐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됐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군부와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987년 1월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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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치니 갑자기 '억'하고 쓰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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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1987년 1월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박종철 사망 기사를 보도한 뒤 1987년 1월16일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과 박처원 치안감은 기자회견을 열었다.그들은 기자회견에서 박종철 사망 원인에 대해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다"며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밤 12시쯤 요절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당시 부검의 의사 진술을 확보해 고문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보도하자 강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고 진실을 실토했다.
강 치안본부장은 1987년 1월19일 기자회견에서 "박종운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한 차례 잠시 집어넣고 내놓았다"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고 밝혔다. 이후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 경찰관 2명을 사건 주도자로 지목한 뒤 구속해 사건을 축소했다.
사건 은폐 정황은 1987년 5월18일 김승훈 신부에 의해 밝혀졌다. 김승훈 신부는 이날 대공 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김승훈 신부의 폭로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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