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가로질러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혜리.
내 머리카락이 물에 휩쓸려 요동칠 때
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는 정오의 빛이 지나가 항상투명해지고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생각하고 금세 잊어버린다강지이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수영법’ 중에서
며칠 전 서울에는 폭설이 내렸는데, 우리는 여름 한가운데서 만났네요.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지 여름을 굉장히 좋아해요. 어느 순간부터 겨울에는 며칠이라도 여름 나라에서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 됐어요. 떠나기 전 생각만 해도 좋았는데 막상 와보니…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웃음) 너무 좋습니다.
심지어 아만풀로죠.(웃음)
아만은 처음이라 기대를 굉장히 많이 하고 왔어요.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곳이잖아요. 하나의 철학 아래 나라와 지역에 따라 고유의 분위기를 내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아만 정키’라고 아만 마니아들을 부르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쉽게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라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웃음) 앞으로 아만에 또 오고 싶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저는 하와이를 가도 와이키키 쪽에는 안 가고 카할라 쪽에 있거든요. 보통.
어떤 성향인지 알 것 같아요. 숨어드는 여행자.
복작거리는 곳보다는 잘 쉴 수 있는곳, 내가 나 자체로 있어도 아무런 부담이 없는 곳, 그런 곳에서 지내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만이 딱 그런 곳인 것 같아요.
지난여름 영화 <빅토리> 보고 나서 이혜리라는 배우에 대해 새삼 좋은 인상을 갖게 됐어요. 잘 만들어진 건강한 이야기를 만났을 때 차오르는 충만감을 느꼈습니다. 이혜리 배우가 자신의 시간에 맞게 작품을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 역시 <빅토리>가 제 필모그래피에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란 작품이에요. 재미있는 게 촬영 초반부터 모두 저를 믿어주셨는데 정작 제가 저를 못 믿었어요. 오히려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어요. <빅토리>는 제가 한 게 없는 작품이에요. 충실하게 ‘필선’의 마음만을 생각하고 임했거든요. 오히려 그걸 좋게 봐주신 것 같아 감사하죠. 개봉하고 영화를 보면서 제가 출연한 영화지만 굉장히 벅차올랐고, 그 감정이 참 좋더라고요.
반면에 최근 촬영을 마친 드라마 <선의의 경쟁>은 하이틴 미스터리 스릴러죠.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고, 지금까지 만나지 않았던 캐릭터예요.
‘이런 이야기는 처음 보는데?’ 하며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결을 지닌 작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의의 경쟁>을 촬영하는 중에 다른 스케줄을 하러 가면 많은 분이 “혜리 느낌이 달라진 것 같아”라고 하셨어요. 신기한 반응이었죠. 특별히 바뀐 게 없는데 작품의 결이 내게 묻어나는구나, 작품의 영향으로 내가 조금씩 변하는구나 싶더라고요.
변화 앞에서 이혜리는 어떤 사람이에요?
사실 저는 머물러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식당을 가도 10년 넘게 한 식당만 가고, 심지어 그 식당에서도 여러 메뉴 중 한 가지만 먹어요.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주문할 때도 한두 번은 새로운 토핑을 추가할 법한데도 늘 같은 것만 먹어요. 여행도 가봤던 곳에 가는 걸 더 좋아하고요. 다른 걸 도전해봐도 ‘그렇지, 역시 내가 먹던 게 제일 맛있네’ 하며 돌아가요. 그래서 “저 새로운 거 별로 안 좋아해요”라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근데 작품할 때는 너무 신나요. 평소에는 머물러 있는 사람이지만 작품을 할 때는 다른 결의 어떤 것을 해볼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작품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낯섦을 경험해보는 거네요.
이걸 다르게 보실지 모르지만, 결국 다 제게서 나오는 거잖아요. 이 일을 10년 넘게 하며 드는 생각은, 저는 이미지가 굉장히 뚜렷한 편이라는 거예요. 그게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고요. 한데 그 정도로 밝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그렇다고 말해도 대부분 “아, 그렇구나” 하고 마세요.(웃음) 근데 때로 그게 걱정되기도 하죠. 아, 내가 그렇게까지 밝고 순수한 사람은 아닌데… 무슨 말인지 아시죠?
모든 사람이 한 톤의 밝음으로 매일을 살아갈 순 없죠. 하지만 혜리 씨만의 밝음은 유튜브 채널에서 가장 부각되고, 동시에 사랑받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아주 사소한 것도 잘 포착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것도 제 장점이자 단점인데, 오지랖이 좀 넓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주변 소리가 다 들리고, 굳이 안 봐도 될 게 보여서 참견을 많이 해요. 잔소리도 많이 하고. 예를 들어 촬영 전에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뭘 떨어뜨렸어. 그럼 뭐가 떨어졌구나 하고 말면 될 걸 ‘뭐야, 뭐야. 뭔데 뭔데. 뭐 떨어뜨렸는데’ 하는 느낌.(웃음) 그래서 그런 것들을 카메라로 담다 보면 무언가를 포착하는 모습이 많이 담기는 것 같아요.
근데 보통의 채널에서는 편집할 장면들이잖아요.
저는 오히려 그런 장면들을 편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좋은 연출가네요.(웃음)
그런 것도 있어요. 이거 되게 웃긴데, 제 생일에 친한 친구가 케이크를 들고 “이걸 쏟을까, 말까. 쏟을까 말까” 하며 장난을 쳤어요. 그러다 저한테 정말 쏟았죠. 생일이라고 새 옷을 차려입었는데 저한테 몽땅 쏟았어요. 그때 제가 친구한데 “하…,빨리 찍어”(일동 웃음) 한 거예요. 이 상황을 빨리 찍으라고, 열받기는 하는데 나중에 보면 웃길 것 같으니까 빨리 찍으라고 했어요. 근데 제가 덤벙거리는 면이 있다 보니 제 바지 단추 하나가 풀어져 있었더라고요. 단추가 엄청 많은 옷이긴 했는데.(웃음) 동생이 보더니 빨리 지우라고 해서 올리자마자 빛삭 하긴 했어요. 빛삭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여름 러버지만 좋아하는 겨울의 순간들이 있다면요?
새해를 좋아해요. 연말의 약간 가라앉은 기분을 벗어나 새해가 되면 기지개를 펴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아요. 다이어리 첫 페이지를 쓸 때 드는 느낌이 좋아요. 다시 새 삶을… 근데 사실 내일 해도 되는 거거든요.(일동 웃음)
그쵸. 지금 해도 돼요.(웃음)
뭐 10월 6일에 해도 되고, 4월 8일에 해도 돼요. 근데 왠지 1월, 새 마음가짐으로 새 다이어리를 펴는 그 기분 있잖아요. 그리고 한겨울 새벽에 일어났을 때, 해 뜨기 전의 어둑어둑함이 좋아요. 그때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면서 안 보던 책도 한번 펼쳐보고. 오늘부터 이 루틴으로 살아야겠다 하고 다짐하는 순간들이 좋더라고요. 작심삼일이라 하더라도요. 내가 아주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자, 2025년 1월 1일 다이어리를 폈습니다. 첫 문장은 뭐라고 쓰고 싶나요?
첫 문장. 어… 저 이런 거에 되게 의미를 담는 편이라서.(웃음)
첫 문장, 중요하죠.
‘균형을 맞추며’.
무엇과 무엇 사이의 균형인가요?
많은 것이 내포돼 있는데요. 얼마 전에 엄마를 만났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자주 못 가서 엄마가 많이 서운해하셨어요. 근데 부모님 집이 제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거든요. 쉬는 날에는 주로 부모님 집에 가 있을 정도였는데, 제가 생각해도 좀 서운해할 만하다 싶을 만큼 못 갔어요. 원래 엄마가 저를 별로 안 찾으시거든요. 전화도 잘 안 하시고. 근데 오죽했으면 서운해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무슨 중요한 일을 한다고 엄마를 서운하게 했을까 싶더라고요. 균형을 좀 맞추자. 누군가를 대하는 데에도, 제 욕심과 현실 사이에서도, 게으름과 해야 할 일들, 혹은 내 고집과 타협해야 하는 순간들 사이에서도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아요. 특정한 것이 있다기보다 삶의 전반적인 면에서 균형을 맞추고 싶어요. 무언가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도 배우고 싶고요. 균형을 맞추며.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