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걸스' 한국 지부, 그 첫 이야기

'오프라인 걸스' 한국 지부, 그 첫 이야기

바자 2025-01-09 08:00:00 신고

3줄요약
이름은 무엇인지, 어디 사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서로를 짐작할 수 있는 아무런 정보 없이 날짜와 시간, 장소만 정해두고 만난다. 참가비도 사전 등록도 필요없다. 연령도 국적도 무관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모임. 함께하는 동안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유일한 규칙이다. 디지털 디톡스를 꿈꾸며, 혹은 아날로그 방식의 만남을 상상하며 어떤 식으로든 한번쯤은 그려봤을 형태의 만남이 지금, 독일 베를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일명 오프라인 걸스(Offline Girls). 매주 30~40명의 여성들이 모여드는 이 모임의 시작은 작년 10월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offlinegirls.official)에서 찾은 정보에 의하면 시작은 가벼운 산책이었다. 매주 일요일 오후 12시 반.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 공원의 분수대 앞에서 만난 여성들은 함께 걸으며 친구가 되었다. 삼삼오오 팀을 꾸려 원데이 클래스를 수강하거나, 핼러윈과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파자마 파티를 열고, 드레스 코드를 정해 모이는 걸스 나이트를 주최하는 등 모임의 규모가 커질수록 콘텐츠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피드를 스크롤할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의구심이 피어난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에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시절이 없었던 나에겐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렇게나 다채로운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사실이 허구에 가까워 보였다.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서 어딘가 단단한 결속력까지 느껴지는 이 여성들의 관계가 정녕 처음 만난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두려운 일에 가깝지 않나? 그래서 궁금했다. 베를린이 아닌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모임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또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지. 그전에,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과 함께하는 오프라인 모임이 성사되기는 할지. 오프라인 걸스의 한국 지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모임을 만들기 위해 ‘문토’라는 소셜 모임 앱을 주로 활용했다. 금요일 오후 2시 서울숲역 3번 출구 앞. 장소와 시간을 공지하고 함께 산책하고 차를 마시는 1시간 반 남짓한 일정을 소개한 글을 업로드한 뒤엔 우려와 기대가 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좋아요’ 수는 늘어나지만 정작 참여하겠다는 사람은 없는 상태로 영겁의 3일이 흐른 뒤. ‘민밍민’이라는 닉네임의 첫 참가자가 나타났다. 모임에 대한 관심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때부터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는 그다음의 문제가 되었다. 오프라인 만남까지 이어갈 의사가 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다음 모임의 가능성까지도 있는 것일 테니. 모임 당일,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끝내 연락이 닿지 않은 두 명을 제외한 채, 총 여섯 명의 여자들이 함께했다. 이름 대신 닉네임으로 서로를 확인하며 머쓱한 웃음이 오갔다. 어색한 공기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걷는 것이었다.
학교 복학을 앞둔 대학생과 졸업을 하고 회사에서 막 일을 시작한 사회초년생, 아닌 밤중에 발생한 국가 비상 사태에 야근으로 지쳐 있던 언론사 직원, 프리랜스 디자이너, 경복궁 한복 대여소에서 일하는 중국인까지.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여성들에겐 20대라는 사실 외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가장 신기한 건, 어느 누구도 선뜻 먼저 나서 말을 꺼내지 않는 소극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낯을 가리고, 자신을 소개하는 일을 어려워하는 이들은 대체 무얼 기대하며 이 모임에 참여한 것일까.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걷는 걸 좋아해요.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사람을 사귀기 편한 방법은 없는 것 같고요. 사실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목적 같은 것보다는, 그저 같이 걷고 대화하는 시간만이 줄 수 있는 환기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공감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있을 테니까요.”
휴대폰 대신 핫팩 하나씩을 손에 쥐고 한적한 평일 오후의 서울숲을 걷는 동안 대화의 주제는 이리저리 튀었다. 며칠 전, 그러니까 12월 3일 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분노와 무력함을 오가며 지새운 밤의 이야기를 입이 마르도록 주고받다가 산책 중인 강아지를 보고서는 각자의 반려견 자랑에 열을 올리는 식의 대화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실제로 모임을 주최해보니 휴대폰을 보지 않는다는 규칙이 가장 중요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는 자잘한 요소, 이를테면 카톡 메시지 하나마저도 지금의 어색한 상황에 온전히 집중할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요인이 되니까. 모르는 것이 있을 땐 검색 대신 손짓과 몸짓을 동원해 설명을 하고, 서울숲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이 새어나올 때마다 휴대폰으로 향하는 손을 억누르고 한동안 같은 자리에 머물러 같은 풍경을 공유해야 했던 덕에 함께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둘이었다, 넷이었다 자연스럽게 대화 상대를 바꾸어가며 나직한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뜻밖의 접점을 발견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이파이브를 하게 되는 순간도 여럿 있었다.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 처음 만난 사람이 보여주는 공감과 지지로부터 얻는 위로 같은 것들이 내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칼바람에 두 볼이 얼얼해졌을 때쯤엔 근처 카페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불과 1시간 전의 서먹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디오가 빌 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건 카페를 나서면서 깨달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날 이후 우리 여섯 명이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거나, 평소에도 연락을 하고 지낼 만큼 죽이 잘 맞는 친구가 된 건 아니다. 모임 이후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다. 그저 뉴스를 보거나 인스타그램 피드를 훑어보다 우리가 나눈 무수한 대화의 일부가 떠오를 때 한 번씩 그 흔적을 곱씹어볼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답지 않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별소리를 다 했다. 올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뒤 내 안에 생긴 불안에 대해, 해가 갈수록 새로운 사람 만나기를 멀리하려는 방어적인 태도에 대해. 누구보다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의존적이고 외로움을 느끼는 성향인 것 같다는 고백을 불쑥 꺼내 일순간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것도 같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한 번 보고 말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두가 또래인 데다 성향까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 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의 목적이 그저 만나서 눈을 마주보며 대화하는 단순한 일에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마음만 먹으면 만나지 않고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 보통의 방법을 벗어나 수고스럽고 조금은 불편한 선택을 감행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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